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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기고문

어느 한 밀레니얼의 기고문

어느 한 밀레니얼의 기고문
샤제

 

 

 0.

 나는 어렸을 때부터 비규범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이런 부류의 삶은 평소 적당히 무해한 척하는 가면무도회의 애티튜드를 놓아버리거나 가장假裝에 실패하는 순간 끝장나 버린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나는 사회성이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나의 한정된 두뇌 용량을 적잖게 소모해야만 했고, 매사 너무나 조심스러웠다. 비굴하게도 나는, 당당하게 싸워버리는 대신 꽤나 몸을 사리며 내게 주어진 대학 생활을 견디려 했다. 이미 고등학생 때 죽을 각오로 싸웠고, 그로 인해 가장 확실한 케어를 받았어야 했을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을 외려 지옥처럼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보존을 도모하고 싶었다. 사실 대학에 와서도 래디컬 페미들이나 남페미들과 입씨름은 했으니 완전히 정치적 무해함을 가장했다기에도 좀 어폐가 있지만, 여하간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글은 시종 이 정도 수준일 예정이다. 아주 조잡하지만, 애석하게도 반 년을 바쳐 이 주제에 대해 성심성의껏 레포트를 쓴다거나, 논문과 사회학 개론서와 성노동 개념을 명시하는 책들을 총망라해 서발턴과 비체의 개념을 기초부터 개괄한다거나, 되도 않게 빈약한 논리로 우리를 공격하는 저들의 논지를 하나하나 반박해서 자가당착과 모순을 조롱한다거나……. 그렇게 변해하고 고증하고 증명하기엔 내가 너무 지쳐버렸다.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 승인받지 못해 부모, 형제, 친우, 심지어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서 태어나면서부터 살아가는 내내 매번 시험대에 올라야만 했던 이들은 그렇다. 생애 전반 철저히 말을 갈취당해 호소할 힘조차 없다. 언제나, 모든 순간에. 당신들이야 ‘그래도 역시 잘 모르겠다’며 논점을 빠져나와 다시 가해를 반복하면 그만이겠지만. 얼마나 손쉽게 채우는 자존감이며 자기보존인가? 세상을 바꾸는 게 이렇게 힘듭니다, 혐오자들이여.

 

 

혐오자 컨베이어 벨트


 글을 쓰고 갈아엎는 지난한 시간 동안 나는 내 이야기를 쓰려다 지우고, 다시 넣다가 이내 또다시 전부 지우는 짓을 반복했다. 왜? 언젠가 카페에서 밀사와 수다를 떨던 날, 밀사로부터 ‘스스로의 경험을 잘 조응시켜 연대하고 투쟁해줬다’는 평을 들어서? 하지만 나는 기나긴 세월을 견디면서 장문의 글을 쓰는 법도 잊어버렸고, 나란 인간—비규범적 인생의 극단을 치닫는—의 조악한 이야기를 애써 지어 팔아본들 거기에 무슨 효용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하여 거의 몇 달을 ‘그러니까 글은 안 써도 되겠네’ 하며 포기하고 신나게 게임으로 허송세월했으나……. 결국 이렇게 처음의 열망으로 돌아와야만 했고, 글을 써야만 했다. 이 시간을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는다면 나 역시 종내엔 억울할 테니까. 이토록 비루하고, 결국 흔해빠진 하소연으로 마무리될 따름인, 아마 투쟁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비굴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이 자리를 빌어 호소하는 것이 한없이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든 정말로 쓸모가 있다면…….

 

 

 1.


 나랑 밀사는 2019년 하반기, 일본 애니메이션 <소녀혁명 우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만나게 된 사이다. 그때의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구호 아래 옹기종기 모인 대학생들의 멍청함에 이골이 난 상태였고, 분노와 불안과 악에 받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기꺼워하고 불쌍히 여겨주던 시스젠더-남성 페미니스트들의 행보에 매번 뒷목을 잡았으며, 타 여대에 학점 교류를 신청해 들은 ‘양성평등적’ 강의에 대해 자랑스레 이야기하다가도 성노동 이슈만 나올라치면 끝끝내 내 반박을 회피하고 ‘잘 모르겠다’며 두루뭉술 대화를 끝내버리던 수많은 멍청하고 ‘평범한 여자’(워딩 정말 여성 혐오적이네)들에게 한심함과 불안을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을 계속해서 고립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문화적 소양을 갖추려는 대학생이라면 다들 일본 아니메에서 재현되는 정치사상사를 이해하기 위해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보고, 좌익 만화가들의 작품을 찾고, <맨발의 겐>을 읽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뭐 래디컬 페미니즘 어쩌구를 공부하려 들듯이, 나는 <소녀혁명 우테나>를 보았다. 작품의 향유층에는 늘 열성적으로 그것을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해석의 밑바탕에는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각자의 정치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밀사는 안시를 사랑했고 깊이 이입했다. 상당히 최근까지도 극의 주역인 ‘히메미야 안시’의 프로필 사진을 썼으며, 꽤 예전부터 그리 해왔다. 나는 그것이 거의 그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한다. <소녀혁명 우테나>를 “페미니즘 대작”으로 숭상하면서도 성노동이란 단어에는 바락바락 화를 내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가장 저열하게 이 지점을 공격하며 사이버불링을 해왔다. 다음 사진들은 트위터에서 “안시 프사”로 검색한 결과물들이다. 날조된 프로파간다를 휘두르는 작태들이 아래 캡처본에 잘 나타나 있다. 폭력적이고 지난한 사이버불링에 관람을 유의하자.

 

문제의 사이버불링 현장 캡처본. 지극히 일부만 따 왔다. 확대하면 자세히 볼 수 있다. 모두가 안시 공포증에 걸려 있다!

 

 저 혐오자들의 웅변을 큰따옴표 속에 거칠게 정리하자면, “어떻게 감히 멍청한 성노동(론)자들이 안시가 자신을 혁명하지 않은 착취당하던 시절에 이입할 수 있느냐”, “안시는 극 중에서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가부장제의 역사 속에서 존재한 희생양과 피해자의 상징이며 칼을 맞고 있다가 우테나의 희생과 유대에 감명받아 스스로 착취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진보해 나간 계몽된 캐릭터”인데 “어떻게 감히 안시의 얼굴로 성노동은 노동이냐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뭐, 성노동이란 용어 자체의 뜻도 모르고 해당 개념의 역사적 변천도 활동가들의 투쟁도 기초적인 사회학 개론도 뭣도 모르는 자들의 멍청한 소리지만, 굳이 저런 것 끌어오지 않고 <소녀혁명 우테나>라는 작품 내적인 해석으로만 살펴본대도 저것들은 아주 한심한 생각이다. 눈에 거슬리는 부분만 끄집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우선, 안시의 피해자로서의 위치가 극 중에서 아주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안시라는 캐릭터의 전부는 아니다. 애초에 안시를 포함한 극 중 모든 캐릭터를 ‘인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특정 개념 내지 현상의 ‘상징’으로밖에 보지 못한다는 건, 일개 캐릭터에 대해 그만한 주체적 해석을 내릴 애정과 머리가 부족하다는 방증이다. (한 마디로 오타쿠 실격이란 뜻이 아닐까?)
 2) 우테나가 안시를 ‘계몽’했다는 해석도 왕왕 보이는데, 우선 ‘계몽’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식민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함의를 가졌는지부터 생각해보자. 당신들이야말로 대체 안시와 우테나를 뭘로 보는 거야? 그런 해석을 못 할 것까지야 아니겠으나, 그렇다면 정말 우테나와 안시의 관계를 다른 층위에서 분석해야만 할 것이다. (고작 워딩 따위에나 집착하는 피시충 오타쿠가 된 기분이지만, 이 정도는 딴지 걸어도 되겠지.)
 3) 사실 안시 캐릭터의 상징성이야 극 안팎을 통틀어 굉장히 명확하고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도대체 “성노동은 노동이다”라는 구호가 거기에 왜 위배된다는 걸까? 내가 보기에 이러한 사고방식은 전부, 성노동자가 성노동 과정에서 겪게 되는 모든 착취적 현실을 ‘노동’이라는 ‘위대하고’ ‘남성적인’ ‘신성한’ 단어로 가리고 있다는, 한 마디로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노동 관념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들 <소녀혁명 우테나>의 주제 의식은 잘만 받아먹어 놓고서 끝내 성노동자 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상한 결론에 자빠져 있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안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어지간히도 질투하는 게 분명하다. <소녀혁명 우테나>가 명실공히 완전무결한 페미니즘 프로파간다라고 설파하는 그들이야, 혁명 이전의 안시의 삶 자체를 일종의 결함으로 치부하며 은폐하고 이해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 당연하지. 그들은 안시의 삶을 혁명을 위한 전(前) 과정과 야만적인 상징으로만 납작하게 소비할 뿐이다. 그러니 감히 혁명 이전의 안시의 삶에 이입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할뿐더러 불결하고 괘씸한 것이다. 그들 모두 안시가 혁명 이후로 ‘평범한 여자애’의 삶을 살기만을 원하고 강요하니까. 정작 극 중에서 숱하게 나타나는 그런 방식의 ‘구원자’들에게 안시가 얼마나 노골적으로 경멸을 드러내며 피의 복수를 다짐했는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마치 페미니즘이 숱하게 ‘피해생존자에게 2차 가해하지 말라’고, ‘피해자에게 완전무결함을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쳐왔음에도 대개의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러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렇게 놓고 보면 이런 경향은 새삼 <소녀혁명 우테나>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자신의 비천함을 숨기지 않는 용기 있는 자들에 대한 대중의 막대한 공포와 악의는 끝내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밀사가 안시를 사랑하듯이 나는 마릴린 먼로를 사랑한다. 허나 무례한 페미니스트들은 먼로의 자아 전반이 ‘섹스 심볼화’로 인해 파괴되었다며 그의 죽음을 가부장제의 희생양쯤으로 팔아치운다. 너무도 쉽게. 그의 죽음은 후대 숱한 여성 연예인들의 역사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생전 그들에게 구원을 가장한 가해를 가장 격렬히 일삼았던 자들은, 그들의 죽음에까지 추도를 가장하며 재를 뿌리곤 했다. 사람이 다치고 있어요, 그러니 우선 다치지 않게 접근하는 방식을 배워주세요. 그러나 그 모든 외침과 하소연은 무시되며, 고인은 “봐, 저렇게 살면 안 돼”의 표본으로 쓰이기 위해 꺾이고 소진되다 결국 사람이 아닌 것으로 낙인찍혀 버린다.

 

 

 2.


 뮤지컬 <맨 오브 라 만차>의 알돈자는 치안도 공권력도 법치 체계도, 아무것도 손 뻗지 못하는 시골 여관에서 일하는 하녀이다. 또한 학대당하는 성노동자이기도 하다. 해당 극의 극중극에서는 알돈자의 강간 피해를 2막의 주제를 전환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소비한다. 알돈자를 말 그대로 ‘고귀한 아가씨 둘시네아’로 개종해주려는 ‘라 만차의 사나이 돈키호테’의 신념을 무너뜨리며, 극중극을 기획하는 정치범 죄수 ‘세르반테스’의 희망을 좌절시키는 장치로 소비하기 위함이다. 한국 공연의 경우, 초연 당시부터 2막의 강간 신이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관객들의 항의가 빗발쳤으며, 이를 수정하라는 관객들의 요구는 2018년 공연에 이르러서야 겨우 수용되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구원자와 창녀가 등장하지만, 그 발상은 <소녀혁명 우테나>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것이다.
 알돈자는 극 중 내내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에게 강한 공격성을 내보이며, 이는 구원자 돈키호테에게도 다름없다. 그런데도 그 공격성조차 창작자에게는 끝내 꺼림칙했던지, 극은 알돈자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돈키호테를 죽이는 결말 대신 돈키호테를 용서하며 그의 성녀가 되는 결말로 끝난다. 공연 예술의 주 소비층인 여성 관객들도 알돈자의 ‘공격성 발싸’에 심기 불편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몇 년 전의 어린 나는 ‘알돈자가 화를 내고 자신이 처한 상황 모두에 분개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불쾌히 여긴다는 게 바로 성노동자 혐오 아니냐’라는 논지의 글을 썼다가 몇 분도 안 되어 쏟아지는 수십 개의 악평 때문에,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황급히 글을 내려야만 했다. 왜 그런 일을 겪어야만 했을까, 단지 본문에서 ‘성노동’이란 단어를 써서 그랬을까? 알돈자 역을 수행해낸 여성 배우에 대한 스스로의 자격지심을 들킨 기분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독한 방식으로 반응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어쨌든 <소녀혁명 우테나>의 가장 저열하고 고루한 원전을 찾아 대라면 나는 이 <맨 오브 라 만차>를 꼽겠지만, <맨 오브 라 만차>에는 우테나의 등을 찌른 안시가 없다. 알돈자는 최소한 여관이라는 편협한 공간에 돈키호테를 포함한 남자들을 가둬두고 불태우는 것으로 2막을 전개해야만 했다. <소녀혁명 우테나>의 구원자는 진실을 깨닫고 천형의 세계 오오토리에서 추방당하게 되지만, <맨 오브 라 만차>의 경우엔 ‘일반 여성 관객’조차도 알돈자가 아닌 돈키호테에 이입하게 된다. 창녀 알돈자는 끝내 자기 자신이 아닌 거다, 조금도.
 알돈자를 본인 삶과 완전히 무관한 외부자로 두는,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폭력에 침묵하며 동조하는 ‘여자’들에게 꽤 오랜 기간 절망했고,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알돈자에게 외부자 행세를 했다고 오랜 시간 자책했다. 하지만 알돈자는 대체 어떻게 이 모든 상황을 감내할 수 있었을까? 나는 나와 분리할 수 없는 많은 알돈자들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생각하고 만다. 하여 결국엔 먼 길을 돌아서 결국 다시금 이곳에 다다른 것이다. 나에게는 나 자신을 설명할 언어랄 게 없었고 지금도 형편은 크게 다르지 않아, 나는 여전히 그것을 찾고 있는 중이지만, 안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이때의 알돈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나에게는 출생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늘상 품고 있는 덩어리가 있다. 그 덩어리는 불안감이다. <인간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는 자신의 몸 안에 열 개의 재앙덩어리가 있다고 고백한다. 이것을 인간 누구나 가지는 실존적 불안이라고도 여긴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원히 이해받지 못하는, 불가해의 천형을 안은 자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제 삶의 진실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고유의 언어를 갈구하게 되며, 그 언어를 찾는 과정에서 반드시 누구나 비천하게 여기는 타자를 직면해야만 한다. 사회주의, 성노동, 인권, 주변부의 소수자 정치……. 그래도 난 내 인생이 날 둘러싼 세상에 맞선 투쟁의 연속이었으며 그게 단 한 걸음도 거짓되지 않았음을 믿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나만의 일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정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내 성장 배경에서 이러한 생각은 철저히 비규범적인 일상 속에서나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
 연약한 몸인 채 날것의 세상을 만나버리면, 이내 그 부조리에 마음이 붕괴하고 만다. 난 언제나 어른들과 싸워 왔고, 지치지 않고 내 생각을 말하고자 했고, 내상을 숨겨서라도 나를 보전하고자 했지만, 남은 것은 내상이 곪아 생긴 병뿐이다. 나는 이로 인해 힘들었고, 앞으로도 힘들 것이며, 앞으로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고, 기꺼이 이렇게 살 것이다. 평생을 거절당하면서도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선뜻 온몸을 부수는 변화를 감당해내고,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발버둥을 쳐 왔던 자들이 선택하는 정치란 이리도 뻔한 것이다.
 아마도 2년 전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에선 한창 대학생들의 대외 활동용 공짜 강의가 각지에서 열리고 있었다. 나는 기후학 대중 세미나에 놀러 갔다. 지질학 계열 교수님이 연구생들과 함께 진행한 대중 강연에서 나는 동서양의 기후, 식생, 문명의 발달, 서구권에 의해 묵인되었던 주변부 소수 민족의 삶의 파괴 등등…… 참가자들이 시간과 역량의 한계 내에서 내보일 수 있었던 최대한의 연구 성과물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질의응답 시간에는 오늘날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후 위기에 대해 ‘적응’이나 ‘대응’이란 단어를 쓰는 것이 정치적으로 정말 중립적인지, 적절한지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지극히 개론적이었던 ‘자연과학식’ 강의 내용과 완전히 들어맞는 질문은 아니었다. 다만 그 질문자(아마도 운동가)분은 실제 연구자들의 ‘정치적인 의견’을 확답받고 싶었던 것이었겠지. 기억하기로는, 결국 연구라는 것은 현장에서의 관찰으로 답해야 한다는 지극히 정석적인 답변이 돌아왔던 것 같다.
 거기에서 나는 우리가 아무리 피를 토하며 사실을 밝혀봤자 세상을 바꾸는 축은 절대 될 수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에 끔찍하게 낙담했다. 지금의 사태는 기후과학자들이 거의 반세기 가량 살해 협박 메일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활동가들이 살해당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으니까……? 자연과학이 사회과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완전무결하고 순수한 도피처가 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 사회 구조를 바꾸려는 운동가가 되는 것, 진실을 보는 것…… 모두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이건 불안이다. 우리는 도망칠 수 없다. 최종적으로 나라는 하찮은 존재를 증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론을 찾아내더라도, 그 이론은 물론 나의 존재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우리를 그들 입맛에 맞추어 ‘사회화’시키고 말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내가 모종의 확실한 정치적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 싫다는 이유로, 내가 과학관에서 눈치도 없이 입을 놀리는 운동권 친구에게 데시벨을 낮추라고 간청하는 비굴한 짓을 했던 것처럼. 때로 우연히 이런저런 좋은 계기를 통해 확신을 얻는대도, 그것을 남들에게 알리려면 이후에 따라올 가해와 폭력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결의가 필요하다. 혐오자들에게서뿐만 아니라 동류인 사람들에게서도. 어쩌면 이 연대 기고문을 쓰는 자들 중 일부는 그 ‘동류’에서조차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전혀 동류가 아닌데도 같은 마이너리티라는 이유로 강제로 하나의 집단으로 묶이고 폭력의 타깃이 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4.


 너무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전히 성노동 문제에 유보적이다.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트랜스젠더 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스트)나 SWERF(Sex Worker-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성노동자 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무는 건 한결같다. 물론 어려운 문제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건 그만큼 그들의 마음속에도 성노동 혐오가 만연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도 한창 연대했고 연대를 요구했던 올해 1월 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조차 굳이 ‘저는 성노동론을 지지하진 않지만……’으로 운을 띄우며, ‘범죄’로 사람이 죽어간다고 호소하던 사람들. 그런데 대체 어떤 연유에서 다치는 사람이 생기고, 어떤 행동이 사람을 죽음으로 모는지, 제대로 생각이나 해봤느냐고? 그렇지 않다면 그 호소의 근간에 깔린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주류 페미니스트 집단의 질서를 위배한 대가로 까발려져 효시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떠는 나와, 이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나를 동정하는 학교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똑같이 선해해주는 척하던 나, 이렇게 둘로 자아가 나뉘었다. 나도 웃기지,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친구 단도의 말을 빌리자면, 비체됨은 고역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를 증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숙명은 그 자체로 고통이고 천형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천형을 받는 사람에게는 잘못이 있는가? 고통받는 숙명이란 게 세상에 실재한다면, 과연 그 세상은 정당한가? 그렇지 않다면 희생양에게 특정한 태도를 요구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사람을 멋대로 피해자화하고 ‘고결하고 순결한’ 피해자상을 강요하는 행위를 말이다.
 작년 하반기부터 옹기종기 모인 <소녀혁명 우테나>의 ‘신 학파’는 하나같이 우테나에게 칼을 찌른 안시에게 환호했다. 나는 <모노노케 히메>의 아시타카를 증오했고 산이 부디 인간 세상을 떠나기를 간절하게 기원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안시를 피해자화하는 것은 마릴린 먼로를 피해자화하는 것이다. 그들이 인간으로 살았으며 살아가리라는 걸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세상의 질서는 원래 그것을 거스르는 이들이 본디 어떻게 살아가고자 했는지 철저히 은폐하게 마련이지만, 현시대의 페미니즘마저 그 질서에 문제 제기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떤 숙원도 이룰 수 없고, 어떤 문제도 풀 수 없을 것이다. ‘어려운 문제’라며 회피하기만 하면서, 당장 벌어지고 있는 반여성주의적 폭력에는 아무런 문제 제기도, 연대 표명도, 액션도 취하지 않는 그따위 것이 현시대의 페미니즘이라면.
 마지막으로, 고작 여자들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한 것에 분개해, 눈을 가리고 스스로를 검열하며 정상성이라는 환상에 아직까지 목매는 자들에게 쓴다. 그대들이야말로 착취를 부르짖으면서 가장 착취적인 현실을 눈앞에서 지워버리려 하고 있다. 안타까운 건 너희들이야. 현실 도피하는 것도 너희들이야.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찬란했던 착취자들처럼 살 수가 없다. 너희들을 보고 있노라면 2009년의 ‘기후 게이트’의 재림을 보는 것 같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느라 눈이 뒤집혀 ‘지구온난화는 모두 거짓말’이라 선동하는 언론들, 기후과학자들에게 협박 메일을 보내는 저열한 쓰레기들, 그리고 그들을 신봉하는 인간들을.
 지금은 2020년이고, 우린 불행히도 2020년의 한복판에 태어나 던져져 버렸고, 불행히도 여전히 이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자원은 고갈되어 가고, 대지는 속수무책으로 가열되고, 극한의 기후 위기를 어떻게 수습할지 모르는 구시대의 정책 속에서 진실을 고발하고 전환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음모론에 묻혀버리고,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잔혹하게 죽임당하는 시대이다. 이제 와서 우리가 전후 1950년대의 미국처럼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철저한 망상일 뿐이다. 생존이라도 도모하고자 한다면 부디 현실을 봐라. 그리고 반성해라. 우린 이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종말을 맞이하는 세대다. 당신들은 그걸 바꾸기는커녕 기존 자본주의의 논리 그대로 벽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런 당신들은 안시에게 날아드는 또 다른 칼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죽어가는 세대다. 죽어가는 존재를 사랑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비천한 것을 사랑하면서 비천해지기를 두려워 말아야 한다. 라그나뢰크의 혹한을 받아들이는 북유럽인들처럼, 환경학 계통의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 예정된 세계 멸망을 알고서 미약한 우울에 빠져들었고, 그래서 종국엔 배제되고 억압된 목소리를 애써 찾아가기에 이르고 만, 밀레니얼 세대의 누군가가 좀 쓸모없는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