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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기고문

'창녀-괴롭히기'에 맞서기

'창녀-괴롭히기'에 맞서기
유하

 

 

 

나는 한때 성노동을 했다. 1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대학교 강의가 끝나면 학생운동 단위 활동을 하고, 일정이 없는 날에는 조건만남을 했다. 성노동을 통해 번 돈을 자취 생활에 부족한 생활비로 썼다. 책을 사고 예쁜 옷을 사고 샹그리아를 마시고 텀블벅에도 펀딩하며 나름의 사치도 부렸다. 나는 당시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동을 선택해 돈을 벌었다. 일종의 ‘강요된 선택’이었다. 이 시기에 나는 쉽게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다. 동시에 어느 때보다 다채롭게 내 삶을 꾸리기도 했다.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고, 사회적 약자의 집회를 연대 주최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고, 문화생활에 투자했다. 앞서 ‘강요된 선택’이라고 이야기했듯 조건만남을 하고 다니는 게 즐겁지는 않았다. 합의하지 않은 부분의 관계로 명백한 강간을 당한 적도 많다. 그러나 그 시기의 내 경험을 피해만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짓을 저질러서도 안 된다. 지금 나는 내 삶의 궤적에 성노동이 있다는 강한 자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착취적인 성산업 구조에 반대하고 성매매를 폐절해야 한다고 믿는 동시에 성노동론자로 남기로 했다. 성판매 경험이 ‘성매매 피해’든 ‘주체적 성노동’이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든(아마 대부분의 성노동자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성노동자 개인이 온전히 스스로 증언하기를 응원한다.
 
메루메루 님은 내 주변인들의 친구이며 성노동자/성노동론자이기에 생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고인의 트윗에 공감했고 잠깐 서로 팔로우했을 때는 내심 친해지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와중 메루메루 님의 부고는 충격적이었다. 밀사 님께서 건강 악화로 병원 입원까지 고려하다 요양할 겸 친구를 도울 겸 익산에 가신다고 하던 날을 기억한다. 그 일을 꼬투리 잡아 이렇게 2년이 넘게 집단적이고 지속적인 괴롭힘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나는 메루메루 님을 더 적극적으로 추모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메루메루 님의 친우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추모의 자격을 스스로 검열했다. 그래서 비뚤어진 반성매매에 고인을 이용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을 때 크게 목소리 내는 것에 주저했다. 이를 후회한다.


누군가 겪고 있는 폭력에 연대를 선언하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다. 연대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어떤 부당함을 인지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돌아가려 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이다. 폭력이 알아서 끝나기를 소망하며 조용히 기다리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지금 나는 밀사 님에게 2년이 지나도록 이어지는 집단적 폭력에 맞서 연대하며 이를 되새긴다. 이 사이버 불링이 끝나기를 소심하게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자살 생존자를 친구를 죽인 가해자로 모는 역동에 적극적으로 분노한다.
 
나의 글에서는 타자화 기제가 거부감을 손쉽게 혐오발화로 표출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메루메루 님의 사후 주변인들에게 이어지는 괴롭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창녀’를 여성 호모소셜(동성사회)의 균열로 여기고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창녀-괴롭히기'라고 지적하려 한다. 고인의 주변인에게 이어지는 가해는 반성매매 정치라 할 수 없는 집단적 '창녀-괴롭히기'일 뿐임을 명료히 하려 한다.



‘창녀’를 증오하는 여성들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분명 ‘일반 여성’들은 ‘창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장 근본적인 권력관계 중 하나인 성차의 억압에서 스스로의 인격을 지키려 한다. 성별의 권력관계가 공고하고 강간 문화가 만연한 사회는 여성의 인격을 갉아먹는다. 여성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격이라 여겨지는 웃음, 감정 등을 팔아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한다. ‘창녀’라는 표상은 이를 극단적으로 대표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여성이 성산업에마저 뛰어드는 가능성은 없어야 한다. 성노동자는 최후의 보루를 팔아치운 변절자가 된다. 이 과정에서 성노동자가 어떤 서비스를 팔든 어떤 피해를 입든 인격 주체라는 중요한 사실은 외면당한다. 성노동자를 증오하는 여성들은 성노동자가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이들은 성노동자를 어떤 상징으로만 보고 있다. 각자의 개성과 삶을 가진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더러움, 성적 모멸감 등을 떠올릴 뿐이다. 그렇게만 상징되는 타자(‘창녀’)를 보며 일어나는 거부감, 두려움, 죄책감과 같은 감정들을 해소하려 한다. 이를 위해 타자화의 전략들을 동원한다. 평소에 애써 외면하다가도 충격적인 사건을 마주하면 납작하게 왜곡해 목소리를 높인다. 성매매 현장의 폭행, 살인, 인신매매 뉴스에 분노한다.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피해 입는 여성들이 불쌍하고 성매매를 척결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는 방향성을 반성매매론으로 잡는 것을 문제제기하는 게 아니다. '창녀'를 미워하는 여성 대다수는 타자를 보며 즉각 떠오르는 거부감만 있을 뿐 문제의식을 살피고 고민하지 않는다. 결국 반감에서 그친 발화는 성산업에서 고도로 복잡하게 얽힌 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성산업 종사자를 향한 혐오의 형태로 손쉽게 가닿는다.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며 몸집을 불린 혐오는 착취적 구조 속에서 어떻게든 노동을 하고 있는 성노동자를 더 취약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외면하고 싶었기 때문에 끝까지 상황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지는 않으려 한다. 본인의 정상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싶지 않아하는 기제는 반드시 사회적 소수자를 배제한다. '창녀'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여성들은 노골적인 타자화로 이들을 고립시키고 있다.
 
적극적으로 성노동자를 괴롭히며 나름의 이유를 확실히 가진다고 해서 그것을 반성매매 정치라고 용인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여성이 아니고 ‘일반 여성’으로 간주되지도 않지만 나 역시 ‘창녀 일’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나는 성노동을 다시 하지 않고 생활을 꾸리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나의 신체·정신·사회적 건강이 걱정되어 더 안전한 일을 하고자 한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보자. 나는 성노동에서의 안전과 건강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안전한 일을 원하는 것처럼 당연하다. 해결의 방향성은 쟁점이 될 수 있다. 성노동론이 아닐 수도 있다. 사회적인 해결방안은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성매매를 없애고 탈성매매를 이끌기 위해 성노동자의 노동권 보장을 도구적으로 쓸 수도 있다. 모두 정치적 입장의 일종이다. 그러나 성노동자들을 악의적이고 집단적으로 몰아세워 괴롭히는 것은 성산업에 대한 의견 개진으로 여길 수 없다. 이는 본인에게는 중요한 것을 타인에게서는 박탈하고 싶은 태도일 뿐이다. 그렇게 나와 타자의 차별을 두고 싶은 것이다. 비겁하고 저열하며 해롭다.
 
워마드발 '랟펨'으로 대표되는 성노동자 배제적 급진주의 페미니스트(SWERF), 트랜스 배제적 급진주의 페미니스트(TERF)들은 트위터 중심으로 2년 전인 2018년 4월 2일 메루메루 님의 부고를 도구삼아 저열함에 박차를 가했다. ‘포주 밀사’라는 적당한 타겟이 설정되었다. 지난한 과정에서 거짓선동은 퍼지고 많은 이들이 동조해왔다. "메루메루 님이 감금되어 몸 팔다 죽었대요". "성노동론자 밀사가 포주였대요". 그렇게 트윗과 리트윗 하나하나로 혐오의 비탈길에 돌멩이를 보탠다. 여기서 페미니스트 집단을 호명한 것을 페미니스트 낙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성구매자 한남이나 포주가 더 문제지 않느냐 따지는 건 적절치 않다. 그건 폭력에 저항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셈이다. 여성 호모소셜 내 정상성을 지키고자 성노동자를 배척하는 경우의 특수성은 분명 존재한다. '일반 여성'이 '창녀'를 향하는 고유한 폭력이 있다. 고인을 이용해 그 주변인을 괴롭히는 가장 큰 주체는 성노동자를 배제하는 페미니스트들이다. 한남에 비해 절대적인 권력주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어떤 사건에서 가해자를 뭉뚱그릴 수는 없다. "혐오 선동하려 한 적 없다. 문제적 상황을 지적했을 뿐이다", 라고 해명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정말 안타까운 죽음에 화가 나고 걱정되었을 뿐이라면 상황을 입맛대로 판단해 '성매매 피해자'들 쪽으로 자극적인 말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발화가 메루메루 님의 주변인과 다수의 성노동자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몰랐고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책임은 달라지지 않는다. 집단적 괴롭힘에 대한 피해 호소가 이어졌는데도 쉽게 던진 발화에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가해를 인정하고 무겁게 책임을 느끼고 피해자의 요구를 이행해야 한다.
 
여성 호모소셜을 굳건히 하려는 이들은 균열을 만드는 존재를 괴롭힌다. 나도 여자가 되고 싶었다. 여성의 호모소셜리티를 선망했고 그 허구성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럴수록 ‘진짜 여성’들이 생각하는 여성성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만인지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일반 여성'들은 산산이 부서지는 연약한 여성성의 파편으로 자꾸만 타인을 찌르고 있다. 깨진 조각을 끊임없이 그러모아 다시 자기들만의 여성사회 건설을 시도한다. 그러다 본인의 손도 다치고 있다. 이 불행한 이야기를 배제적인 여성 호모소셜의 수호자들만 보지 못한다. 그들이 보지 못하면 누가 멈출 수 있나. 여성/소수자의 삶정치를 생각하며 ‘모두 사소하고, 모두 무고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사소하고 무고한 이들의 수행을 찬미하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모두 사소하지만 모두 무고하지는 않다. 실은 그것마저 틀렸다. 메루메루 님의 삶을 마음대로 가공해 주변인을 괴롭히는 가해자들은 전혀 무고하지 않기에 사소하지도 않다. 사소함도 무고함도 잃으며 불완전한 존재로서 온전할 수 있는 모든 기반이 사라졌군요!


그렇지만 이제 안타까워할 수는 없다. N번방 해시태그마저 거짓선동에 이용했다. 이를 불쌍히 여길 사람은 없다. 결국 그 어떤 여성도 지켜주지 못하는 여성성 수호였다. 사건의 진상부터 파악하자. 석영 님의 글 『진상 : 창녀를 증오하는 여성들』(티스토리 블로그 ‘시스터 후어사이더’)에 사실관계와 가해의 연대기가 정리되어 있다. 실질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동조해왔지만 이제라도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게으름의 폭력을 멈추자. 진짜 정황을 돌아보자. 여성/소수자의 약자성에서 나온 정당한 두려움은 정당하지 않은 행위를 부추기곤 한다. 자극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를 접하면 외면하고 싶을 수 있다. 제대로 알고 싶지 않으면서 욕 한마디 보태는 것도 하나의 방어기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계속 포장하기만 하는 건 모두에게 무익하다. 배척과 폭력의 정치는 공포를 덜어주지 않는다. 두려움의 원인인 성착취 현실에도 도움을 줄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괴롭혀야 안도감과 자기만족을 얻는다면 그만큼 비참한 일이 있을까? 생각이 다르고 공감이 되지 않아도 타인의 취약함이 공격받는 걸 인지한다면 책임있게 행동해야 한다. 이미 고인의 주변인 분들이 증언해왔고 많은 이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사이버 불링을 이어나가는 것은 단지 고인을 도구로 또 다른 죽음을 부추기는 것일 뿐이다. 비극은 뒤늦은 변명으로 돌이킬 수 없다.

 

 

 

이 사이버 불링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 #밀사님은가해자가아니다 #메루님을도구화하지마라 해시태그로 연대할 때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다들 그럴 것이다. 피해자도 연대자도 모두 각자의 사정에서 무리하고 있는 현실이다. 밀사 님을 비롯한 피해자분들은 2년이 지나도록 사이버 불링에 대응해야 했다. 가해자 당신들이 왜·어떻게 멈춰야 하는지 온 에너지로 설명해온 게 관대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감히 내가 지긋지긋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질기게 이어진다. 그건 아니라고 설명하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화를 내고 계속 흡혈귀처럼 쪽쪽 뽑아서 쓰레기통에 갖다버렸다. 웃기지도 않는다. 인간이 동료 인간에게 주는 오래참음과 자비를 너무들 업신여긴다. 피해자도 인간이기에 아프고 견디기 힘들다. 그럼에도 부당함을 호소하며 상대가 태도를 바꾸길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걸 가해자들은 알고있다. 이 점을 이용해 끝까지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취약한 이들에게 그렇게 악독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_자격_없는_여성들과_세상을_바꾼다. 괴롭히기 놀이는 자기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는 힘을 이길 수 없다. 이 사이버 불링은 눈치게임에 실패하는 사람이 법정에 서는 결말로 끝날 것이다. 오래 참음은 영원하지 않다. 자비는 당연히 제공되는 무한재가 아니다. 괴롭힘을 페미니즘으로 포장하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의 인간성부터 지켜야 할 것이다. 사실 ‘진짜 여성’만의 페미니즘은 처음부터 균열을 품고 있었다. 어차피 성노동자는 당신 곁에 있다. 완벽한 타자 만들기는 실패할 것이다. 정상성의 울타리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속 성노동론자로 살아가려 한다. 성매매가 착취임에 공감하기에 성산업이 존속하는 한 여기서 노동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섹슈얼리티와 노동이 교차하는 가장 취약한 곳에 함께하며 성노동자의 해방을 이야기할 것이다.

 

덧붙여, 글을 탈고하는 지금 130주년 세계노동절이 다가온다. 노동절을 앞두고 성노동자의 노동권을 꿈꾼다. 노동해방을 꿈꾼다. 성노동자도 노동절의 주인공이다. 성노동자로 살다 간 메루메루 님, 노동절을 맞아 당신을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