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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기고문

여성주의를 초과하는 사람들

여성주의를 초과하는 사람들
막야

 

 

 

한 사람이 사망했다. 자살로 알려졌다. 그런데 생전 또는 사후에 그를 트위터에서 알게 된 사람 여럿이 그 죽음을 소명하고 책임을 규탄하는 양, 싸불을 했다. 고인의 지인 중 하나를 주로(거의 단독으로) 겨냥한 싸불이었다.

싸불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부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떤 사유로든 정당화가 불가하다. 있어서는 안 될 가해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그 소명과 규탄 자체는 혹시 진실 내지는 일리라도 지녔는지 들어봤다. 들어봤다가 나는 울화가 치밀고 말았다. 진실 내지는 일리를 혐오에서 기인한 비약이 대신했고, 그 간극들을 여성주의의 대의로 하여금 메우게 하고 있었다.

아닌가? 역순이던가. 여성주의의 대의가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의 간극을 잇는 데 실패하므로 비약을 거쳐 자각하기 어려운 혐오를 낳았나. 그랬다면 단지 불리들이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여성주의가 연대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1. 비약


내가 이해한바 자초지종은 이렇다. 고인은 메루메루님. 싸불이 쏟아진 쪽은 밀사님. 포주설 등의 유언비어부터 외모 비하, 자살 종용 등 막 나가는 싸불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이하 존칭 생략)

a. 메루메루가 죽은 원인 : 성매매의 착취적, 폭력적 구조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끝내 실패.
b. 실패 원인 : 성노동론 또는 성노동론자인 밀사와의 교류가 고인의 문제 직시 및 해결을 결정적으로 방해.
c. 추가사항: 애초에 메루메루를 성노동론과 성매매에 끌어들인 게 다름 아닌 밀사.

한 사람에게 다른 한 사람의 죽음을 질책하면서, 가정을 세 개나 했다. 오죽 확실하길래 그랬을라고? 증거가 있다더라.

d. [메루메루와 밀사가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양자의 트윗들.
e. [메루메루가 성노동 담론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는 본인의 트윗들.
f. [밀사가 성매매업소에서 일할 여성을 구인했다]고 볼 수 있는 광고글. 
g. [메루메루가 성매매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했었다]는 밀사의 트윗.

이런 걸 제시한다. 하지만 d-g의 정황들이 다소 신빙성을 더해 주는 건 대괄호 속 내용에 국한된다. a-c 가정들의 입증은 고사하고 불확실성을 유의미하게 감할 수 있나? 없다. 반면 밀사는 메루메루와의 문자내용을 일부 공개했는데, 거긴 오히려 메루메루 쪽에서 밀사를 성매매업소에 고용하려 한 정황이 나타났다. 또 밀사 스스로 밝힌 g의 내용은 a-c를 지지하긴커녕 b를 매우 취약하게 만든다. 아래와 같이.

g. 메루메루가 성매매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했었다.
b. 성노동론 또는 성노동론자인 밀사와의 교류가 고인의 문제 직시 및 해결을 결정적으로 방해(?)

성노동론이 지탄받는 건 성매매를 '의식적으로 그만둘 작정을 하고도' 계속하게 만드는 최면마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바로, 의식적으로 그만 둘 작정을 못 하게 할까봐. 성매매에 대한 문제의식을 흐린 나머지 '일종의 노동이구만? 할 만하겠어, 해볼란다.' 혹은 ‘난 지금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러나 그게 내가 하는 성노동과는 무관할 테지.’이렇게 만들까봐서 사탄의 사탕 취급을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고인이 방해받았던 게 문제의식이 아니었다면. 심지어 벗어나 보겠다고 적극 행동으로까지 옮겼다는데. 결국 되돌아가서 치료에 필요한 약까지 빼앗기는 환경에 머물렀다거나 언젠지 성노동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고 해서, 앞서 말한 행동을 통편집하지 못한다. 성노동론은 고인이 성매매 환경을 벗어나고자 결심하는 걸 방해하지 못했다. 그가 끝내 성매매를 택하고 긍정한 사정(들)이 무엇이었든 성노동론과 결부시킬 이유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뇌피셜로 시작된 싸불은 실로 추잡스럽고 집요했다는 거 아닌가. 피해자의 침묵, 항변, 논리, 호소, 정중함, 혈기가 죄다 무용한 싸불이 지속됐다. 해를 넘기고 또 넘기며. 형식은 싸불, 내용은 공갈. 이것이 어떻게 한 여성의 죽음과 여권 후퇴에 대한 의분일 수 있을까.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해당 싸불의 피해자이자 비정형에 주목하는 사회운동가 밀사는 그 행위들의 동기가 성노동(론)자 나아가 비정형 소수자에 대한 혐오라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2. 혐오

확실한 건 메루메루가 죽음에 이른 이유도, 성매매와 성노동론을 접한 경로도 아니다. 성매매와 성노동론 간에 닭이냐 달걀이냐 하는 인과관계도 아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사실로 간주할 수 있는 건 메루메루도, 밀사도 성매매를 경험한 성노동론자구나 하는 것이다. 싸불에 동원되는 일말의 사실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그들은 밀사를 전시하며 그가 성노동론자임에 경멸을 표하곤 한다. 메루메루의 생전에는 그에게도 그러했다고 고인의 지인들은 말한다.

밀사의 트위터를 팔로잉하면서 성노동(론)자들이 겪는 대화를 1년 가까이 지켜봤다. 근데 몇 번만 보면 외울 수 있다. 욕만 빼면 똑같기 때문이다.


A: 왜 성매매 같은 걸 해. 절대 하면 안 돼.
B: 할 수밖에 없으면?
A: 그런 상황이 어딨냐. 편의점 알바라도 하든지, 공장이라도 다니든지.
B: 노동능력이나, 재정의 필요가 다를 수 있잖아.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건 너의 문제 아니야?
A: 성매매로 돈 못 번대! 그리고 정말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으며(?) 그럼 나라에서 지원해 줘야겠지.
B: 미래시제로 강 건너 훈수야? 성노동자들은 지금 임금체불이나 정신적 신체적 폭력, 임신과 낙태, 질병, 사회낙인 등을 겪고 있는데.
A: 성매매를 하니까 그렇잖아, 그만둬야지.
B: 그만두기 어렵거나, 그만두지 않겠다고 결정한 성노동자들에 대해선 그냥 내버려두는 게 마땅한가?
A: 아오, 갑갑. 내버려 두면 안 되겠지. 숙식 해결을 돕고 보호해주는 쉼터 같은 게 있잖아. 빚 탕감이라든지 직업소개하고 훈련제공해주는 정책들도 나올 수 있고.B: 맞아. 그럼 정책의 실효가 나타날 때까지는. 또 그런 정책이 다 미치지 못해서 성노동을 기어이 하는 사람들은 아까 말한 문제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가령 성노동론-
A: 뭐가 성노동이야! 페이강간이지. 여성들이 착취당하고 강간당하고 죽임당하는 현실을 몰라? 넌 미친 거야 아니면 한남이야, 어서 내게 대답해봐.
B: 착취당하고 강간당하고 죽임당하는 여성들 중에 여성 성노동자들은 빼?
A: 그건 성매매를 하니까 그렇잖아. 하지를 말라니까, 성매매.
B:


그러니까 ‘나의 또는 우리의 여성주의 운동과 전략’을 초과한 사람들과 그 처한 현실은 관념처럼 흐릿하고 막연하다. 안 하면 되잖아? 쿨내진동. 그래놓고 포커스는 여성 전체로 넘어간다. 성착취를 정상화하면 안 된다는 것. 그런데 성매매 여성을 여성에 포함시키는 게 아니라 문제로 낙인찍고, 왜 성착취 당하기를 선택했어? 어? 이러는 것이야말로 성착취를 정상화하지 않나. 피해자를 문제 삼는 순간 착취의 성격이 모호해지고, 착취의 구조는 덜 문제가 된다. 개인화한 만큼 사회문제로서는 정상화된다. 성매매 산업이라는 돌출부에서 느낀 경악, 반감, 적개심. 그건 성매매 여성들의 경험으로 보다 촘촘하고 적나라하게 파악된 구조 전체를 향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러지 않을까?

그러니까 밀사 말이 맞는 모양이다. 밀사는 성노동자들은 사람도 아니지? 라고 묻는다. "성매매를 하니까 그렇잖아, 그만두라고 했잖아." 하는 위선의 이면에는 "기어이 하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 살든 죽든."과 같은 냉혹이 팔짱을 끼고 있다. 이 위선 마저 벗어던지면 혐오가 전면 표출된다. 니들 때문에 여권이 후퇴한다, 부역자, 가해자, 한남자지나 매한가지. 싸불을 하고 막 그런다. 그런데 싸불을 안 하더라도 문제란 것이다. 싸불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런 식으로 접근하고 밀어내는 여성주의는 필연적으로 어떤 여성들의 목소리가 주변화, 왜곡 또는 음소거되는 구조와 맥락이 된다. 이는 여성주의 운동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비정을 넘어 가장 극단적인 변질이 아닌가. 여성주의는 바로 그런 목소리를 보존, 확성하여 혐오와 억압을 간파하고 그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있으므로, 이러한 연대의 실패에 신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어느 반성매매 지지자가 바라본 성노동론

‘성매매 하지 마. 누가 하랬어?’가 성착취를 문제화하지 못 한다면. 그럼 ‘성매매도 노동이다.’는 성착취를 정상화하는가? 난 성노동론자가 아니다. 그리고 성노동론에 대한 강경한 비판에 상당히 동조한다. 이를테면 “성착취와 여타 노동의 착취 간에 유사성을 강조하며 중대한 차이를 희석한다.” “여성들이 성매매 산업으로 더 쉬이 유입되었다가 갇혀버릴 위험이 있다.” “기득권(한남)에게 이미 강탈되어 성착취 문제를 정상화하는 데 쓰이고 있지 않은가?” 등등. 하지만 대화와 토론의 여지는 남기고자 한다.

가령, 한남의 성노동론과 여성의 성노동론은 구분될 수 있는가? 이론상으로뿐만 아니라 여성현실에 미치는 영향에서. 남성의 관점과 경험에 기초한 성매매, 성노동 운운은 정말로 성착취를 거래나 노동으로 정상화한다. 하지만 여성의 관점과 경험에 기초한 성노동론도 그런가? 밀사는 성착취를 정상화하지 않으며 한술 더 떠서 가부장제 및 자본주의 사회의 매매와 노동을 문제화한다고 주장한다. 성매매 산업의 착취 구조, 범죄적 성문화, 성노동이라는 워딩을 접할 때 대번에 느껴지는 반감에 견주어 보면, 여전히 정상화된 문제들이 있다. 비판이야 했어도 성매매만큼 정념이 동하지 않았던 인간착취.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 같은 것. 그래서 노동이라니, 성매매가 노동이라니! 하고 성내게 되는 것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실 희석되고 은폐되어 온 것은 성매매와 다른 노동 사이에 차이보다는 유사성이며, 성착취 이상으로 정상화 되고 있는 것이 노동이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 고르게 작동하지 않는 반감이 어떤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을까. 구조를 습관처럼 규탄하던 사람도 성매매 문제는 어쩐지 별다르게 분절시켜 보고, 반감이 거기에 정체하거나 급기야 성매매 여성과 성노동론자를 향해 버리면서 혐오와 낙인을 저지르게 되는 건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은 구조의 가해라기엔 개인의 저항이 너무 부족했던 것으로, 어쩔 수 없거나 당해도 싼 것이 된다.

반면 반감이 그나마 작동하는 지점을 거점으로 감수성에 충격을 주며 인지를 확장시키는 전략을 여성주의 운동은 적극 사용한 바 있다. 성노동론도 그런 기폭제가 될 수 있겠나 하는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 및 가부장제 사회는 충분히 비판받고 있나? 그간의 성과는 분명 있겠으나 거악을 상대론 미약한 것 같다. 착취가 정상화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의 시선을 내면화해 온 역사를 과소평가할 수가 없다. 구조의 민낯 위로 켜켜이 쌓인 껍질들을 잡아 쨀 악력은 지속적으로 획득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성매매 여성들이 ‘자본주의에서 착취 아닌 노동이 없다’고 선언할 때 자연스러웠던 것들이 찢어지는 틈새를 본다. 성노동론을 향했던 분노는 기실 그 틈을 비집고 뛰쳐나갔어야 하는 게 아닐까. 온갖 구조적 착취와 약자성이 중첩된 성매매 여성들의 경험이 노동이라, 뒤집힌 상자 밑바닥처럼 올라갈 때 오히려 폭로가 쏟아져 내리게 되는 건 아닐까. 성매매와 관련 없는 여성들에게 성매매의 실태가 ‘절대 하지 마!’ 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쟤네 꼴 봐’ 같은 비열한 전시 없이도 알려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부득불 성매매를 하고 있는 여성들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유효한 연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야 한남에게서 성노동론을 탈취하여 여성이 갖는 게 어떤가? 여성들의 손에서도 성노동론이, 긍정적인 잠재력을 가질 리가 결코 없단 말인가? 없을 수도 있다. 성노동론이 정상화되어 온 문제를 파괴력 있게 인지시키거나 성매매의 문제를 가리지 않는다고 하기엔 너무 쉽게, 길게, 많은 오해를 다름 아닌 여성들로부터 받는 것 같다. 꼬리를 무는 반론의 반론을 잠시 놓아두고, 그렇더라도 난 성노동론이 지지까진 아닐지언정 적어도 이해받을 수 있는 야망과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노동론에 대한 위 소고보다 내가 훨씬 더 힘주어 견지하는 바는, 성노동론을 비판하더라도 성매매 여성과 성노동론자를 배제해선 안 된다는 것. 성노동론에 반대하면서도 성노동론자인 여성들과는 어떻게 관계하고 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다양한 여성경험과 생존전략의 간극에서 여성주의 연대는 기꺼이 도전하고 노련해져 가야 한다.



4. 연대의 조건

노련해져야 한다고 말했으나 초보의 말을 옮기려 한다. 애초에 기본 상식이 떠내려가는 광경을 보고 쓰게 된 글임을 감안해 달라.

연대의 조건은 전략 보다는 목적의 공유다. 모든 여성이 억압에 고립되지 않고 정당한 권리를 되찾게 하는 것. 이 목적을 위해 목표와 전략은 유연해야 한다. 전략의 충돌은 여성 억압의 현실이 균일하지 않고 과제가 복잡하다는 뜻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운동 주체의 현실인식은 단면이고 자기한정이므로, 타인(모든 비남성 심지어 남성까지도.)에 의해 계속 지경이 부서지고 더 많은 조각으로 다시 모자이크되어야 한다. 어떤 여성들의 증언에 꺼림이 생긴다면 더욱 경청하고 특기할만하다. 여성주의 운동들은 전략이 각기 다르더라도 여성현실은 포괄하고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표 전략에 끼워 맞춰지지 않는 여성은 구슬렸다 호통쳤다 몇 번 해보고선 한남과 동급으로 돌려버리는 식일 리가 없다. 그렇게 하면 운동의 목적과 정체성과 현실적 기초가 날로 앙상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혹 여성주의의 목적만큼이나 불변하는 전략이 있다면 오로지 연대뿐이다.

연대의 조건은 일치보다는 이해다. 많은 경우, 일치가 빠르고 쉽고 그래서 급진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일치와 결속은 폭력과 구분하기 어렵다. 반면 이해는 더디고 지난하다. 그래서 힘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급진만 허용하는 연대와 연대에 의한 급진은 다를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늘 임시적인 규정들을 거친다. 한참 동안 피차 서투르고, 완전히 오해했을 공산이 크다. 그러니까 당최 뭔 말인지 어이없거나 왜 그러는지 알겠다고 불쾌하게 확신했더라도 여지를 만들고 시간이 개입하게 하는 게 중요하겠다. 그러다 보면 이해는 소통이 수차 실패하는 와중에도 누적되고 점증할 수 있다. ‘미쳤나봐. 다신 이야기 안 해. 퉤퉤!’하며 어떤 주제를 한참 처박아 놓더라도 관계와 사람은 남겨야 한다. 시간의 도움을 받은 이해와 타협. 그런 식으로 연대는 성공하고 혐오와 폭력을 실망시킬 수 있다. 모욕해버리면 자칫 관계가 끝나고 싸불하면 자칫 사람이 죽는다.

연대의 조건은 공식이기보다 상황이다. 내가 성매매와 성노동론에 반대하고, 노르딕 모델의 도입에 피토하며 성매매 산업 소멸을 염원하더라도, 성노동론자가 오늘 트위터에서 겪은 싸불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해야 한다. 어떤 집단 범주나 그것의 슬로건에만이 아니라 각 맥락에서 약자된 자의 상황과 필요에 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대가 의제별로 전격적인 변화를 이루는 조직된 운동에 비해 사소할는지 몰라도, 진영의 경계에 갇히지 않고 뭇 여성들과 잇닿아 긴급한 요구와 실용적 결과를 실시간 지닌다.

만약 이 모든 게 헛소리에 불과하다면, 할 수 없이 나는 여성주의보다 큰 쪽을 택하겠다. 더 나은 세상으로 약진하는 운동의 발목에 거치적대는 피해자들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의심스러운 건 더 나은 세상 쪽이기 때문이다.



5. 여성주의를 초과하는 사람들

한 사람이 사망했다. 누구나 죽고 많이들 죽는다. 하지만 여전히 한 사람이 죽은 것이다. 자살이었다. 나는 그를 알지 못했고 알 기회도 남아있지 않다. 성노동론과 성매매의 피해자 메루메루. 그런 임의의 폴더에 점 하나로 남기려 하는 메루메루는 실은 누구였던가? 어떤 사상과 이론, 운동, 사명, 직업이나 캐릭터에 자신을 의탁했든, 사람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거대한 실체다. 한 사람이 사라지고 난 후에, 만들어진 관념의 얼개 속에 도저히 다 수용되지 않는 고유한 시간과 시선으로 그가 여기 있었음이 기억되길 바란다. 한 사람이 다시는 직접 해명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의 마지막과 유품 몇 점으로 추정을 삼가야 할 숱한 이야기들이 그와 함께 묻혔으리라 예우받길 바란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 살아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모른다고 절실히 인정함으로써 이해의 가능성을 자주 보존하여야 한다. 밀사. 나. 당신. 우리는 저마다 여성주의를 초과하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