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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기고문

서랍에서 기억 꺼내어 두기

서랍에서 기억 꺼내어 두기
익명 A

 

 

 

나는 내 생각밖에 없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나뿐이다. 그래서 이 글들에도 내 얘기밖에 없다. 이런 내 자폐적인 상태가 최근 걱정되어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나르시시스트(시가 두 번 들어감)일 수 있을 것 같다. 왜 그런지 생각해 봤는데, 어릴 적에 너무 눈치 없고 싸가지 없게 굴어서 친구들에게 인기 없는 편이었다. 그때의 경험이 날 이렇게 만든 것 같다. 중3 때가 되어서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를 만들었지만 그때까지 반 안에서 내 위치는 불안정했다. 나와 친구들이 그림쟁이였고, 같이 놀던 남자애들도 오타쿠여서 더 그랬다. 그래서 조바심이 많아졌고 웹툰들도 더 많이 보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가장 재밌게 보던 작품이 미지의 세계였고 난 작가가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많은 글을 썼다. 사람들이 내 글(시, 생활담 등)을 재밌게 읽어줘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가 고1이 되었다. 새 고등학교의 첫인상은 안 좋았다. 중상위권의 성적을 가진 아이들이 모여 있었는데, 내 중학교가 급이 낮다고 여겼고 내신이 비교적 유리했다고 말했다. 나는 불안한 심정이었는데, 그때 친구의 소개로 만난 애가 미지의 세계를 좋아한다고 해서 기쁜 마음에 사이트에 자랑했다.

 

그런데 그 글이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친구가 그 글을 봐주고 연락을 해줬다. 그 일련의 일들이 알려지자, 작가는 구버들끼리 직접 만나서 친해지면 좋을 것 같다며 친목 정모를 열었다. 메루를 처음 만난 건 그곳이었다. 아직 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와 본격적으로 친해지지 않은 상태였다(이후 걔는 나랑 사귀고 헤어진다...) 그렇기도 하고 뭔가 나 때문에 만들어진 모임이라는 기분도 들어서 참석했었다. 거기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가 있었는데 재미있고, 트위터에서 할 법한 말들을 장황하게 해댔다. 나는 당시 인터넷 친구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나이대가 비슷한 그 언니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언니와 번호를 나누고 이후 카톡으로 대화했다.

 

그런데 학교생활을 하면서 나는 친구가 생겼고 반에서의 위치도 자리 잡히면서 정말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뭔가 이상하고 나와 코드가 잘 안 맞는 인터넷 사람과 꾸준히 대화하는 일 자체가 피로해졌고, 그런 모임에 나왔다는 사실 자체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 언니의 연락을 씹고 차단했다. 그 언니는 트위터를 했고 그 사실과 닉네임을 알려줬지만, 나는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닉네임을 이후 너무 자주 바꿨기 때문이다. 곧 나는 그때의 일 자체를 잊어버렸다. 미지의 세계도 작가도 너무너무 미워졌기 때문에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실제로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때 사건으로 받은 충격 때문에 지속적으로 상담까지 받았다. 당시 상담 선생님이 내가 상담레벨 1급으로 상태가 많이 안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기억력이 안 좋아서 평소 기억할 만한 일들은 머릿속으로 복기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 당시의 일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학에 갔고 2학년이 됐다. 나는 트위터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고 여러 인터넷 사람들과 멘션을 나눴다. 해당 작가의 사건이 내게 너무 큰 트라우마를 남겨줬기 때문에, 난 무의식중에 메루를 기억하고 있었다. 메루가 누구인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자혜의 팬임은 지속적으로 기억했고, 해당 작가 팬층의 잔당이자 사캐즘을 전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난 해당 작가와 ‘미지의 세계’ 플로우에 동참해온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것이 페미니즘과 사회 전체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면서 관련 얘기들에서 계속 공격했다. 난 팔로워도 별로 없고 영향력도 없는 일개 트위터 인간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인에게도 그런 무리들이 암적인 존재라고 계속 말했고 그러한 내용으로 방송을 찍기까지 했다. 

 

애인은 메루와 맞팔이었고 친한 상태였다. 그래서 애인이 날 계속 이자혜의 잔당이라고 말할 때마다 아니라고 반박했고, 메루가 계속 저렇게 구는 건 다 이자혜의 구버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날 메루가 애인에게 왜 내가 메루 자신을 블락했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 애인은 필터링 없이 내가 하던 말들을 그대로 메루에게 전달했다. 메루는 그런 말들을 인정하며 ‘제가 좀 @@이긴 하죠’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루는 자살했다. 나는 그 날 너무 큰 충격에 휩싸였다. 언니는 장례식에 가려 했지만 나는 가지 말라고 했다. 누군가 지인이 죽은 경험이 없었다. 나는 순간 겁이 났다. 내가 걜 죽였을지도 몰라. 그 감정에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당시 메루의 지인이던 주변인들에게 힘을 실었다. 

 

그런데 당시 걜 불링하던 랟펨들이 갑자기 걜 내세워 이상한 짓을 시작했다. 메루메루는 진짜 이상하고 받아들여지기 힘들 종류의 얘길 하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성노동론에 당한 피해자가 되었다. 걜 진짜로 만난 사람들은 걔가 남에게 무슨 조종을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게다가 걘 이미 예전부터(청소년기부터) 성노동에 종사했고, 구버들의 모임에서 자신의 조건 만남 얘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밀사 님을 만난 것은 최소 그 이후인데 어떻게 메루가 ‘성노동론에 당한 창녀’일 수 있을까.

 

나는 이후 밀사 님과 만나 대화하고 생전 메루의 영상을 보고서 걔가 예전에 모임에서 봤던 그 언니가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찍은 밀사 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교수님의 만류로 상영되지 못했다. 유튜브에 올리는 것도 금지당했다. 교수님께선 내가 인터뷰 당사자의 신변을 보호하기 어려운 형태로 영상을 찍었다고 말씀하셨다.

 

이게 나의 진실이다. 나는 이제 운동권이 아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도 구원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상을 계몽하겠느냐는 ‘주제 파악’이 되었다. 내가 하는 주장들에 책임질 수도 없고. 그런 말들에 누군가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메루는 자신을 블락한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든 메루를 절단하려고만 한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무슨 말을 할까. 메루는 당시에 내 애인을 좋아하던 멘헤라 트위터리안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내 애인과 사귀는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메루가 날 기억조차 못 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 날 기억했다면 어쩌지? 그래서 생각하기가 고통스러웠다. 지금 와선 메루의 친구였던 트위터리안들도 각자의 이유로 트위터에 남아있지 않다. 걔가 남긴 트윗들도 거의 소멸되었다.

 

난 내가 겪은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확신하는 사실 중 하나는 메루가 밀사 님의 글을 좋아하던, 나와 같은 팬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밀사 님이 지속적으로 당하는 불링들에 기분 좋아하진 않을 거란 걸 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밀사 님은 메루의 죽음을 유예시킨 사람이었지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고사 지내던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모임에서의 일은 말할 것도 없고, 메루가 죽은 당시의 일들에 관한 기억조차 점점 흐려지고 있다. 각자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최소한 메루의 우중우중 이전 닉네임을 알고 싶다. 그래야 내가 고등학교 당시 언니와 나눴던 대화를 조금이라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첫째로 걔에 대해 그리고 그때의 나에 대해 더 기억하고 싶어서이고 둘째로 계속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언어화하지도 않으려 했던 것들을 날려먹다가 내가 나 자신을 수렁에 갇히게 할까 봐 그리고 지금 생리 중이라서. 마지막으로 걔는 왜 죽었는지 말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죽는다면 그 이유는 죽을 만해서라고 트윗을 올렸다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여전히 반기를 드는 종류의 빨갱이라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