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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기고문

타자의 고통에 접속하는 윤리

타자의 고통에 접속하는 윤리
데파코트

 

 

 

“ 구슬이 든 상자에 쇳조각을 넣고 흔들면 구슬엔 상처가 잔뜩 나고 어떤 구슬은 깨져버리기도 하는데 가끔씩은 이렇게 제법 매끈한 구슬이 나올 때가 있죠. 저는 이것을 운이 좋다고 부르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훌륭한 것이라고 부르더군요. 이 구슬 안이 깨져있는지 어떤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물론 이 구슬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깨진 구슬을 이것과 비교하며 조롱할 때 얼마나 유용합니까. ”

고 메루메루 님은 성노동자셨다. 메루메루 님은 성노동이 하나의 직업, 서비스업으로 사회에서 인식되는 것을 성노동자를 해방시키는 하나의 길이자 비전이라고 말했으며, 성노동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성노동의 노동성을 부정하며, 성노동자에게 자행되는 사회의 배제와 낙인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고인의 증언들은 성노동자를 혐오하는 성노동-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의 미움과 공분을 샀다. 메루메루 님은 성노동-혐오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소위 ‘성노동론자, 성노동지지자’였다. 고인 트위터 계정의 메인 트윗에는 성노동 혐오자에게 들었던 ‘당신처럼 (창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여성들을 항상 기억하세요’라는 비성노동자의 말이 여전히 걸려있다. 메루메루 님의 메인트윗에 걸려있는 말을 나와 수많은 성노동자들은 지금 현재에도 여전히 듣고 있다. 모두가 똑같이 가난하고 힘들어도 너처럼 창녀가 되는 건 아니야, 모두가 다 너처럼 몸을 파는 건 아니야, 라고. 모두가 다 너처럼 깨지고 망가지는 것은 아니야, 저기 저 사람을 봐. 아무리 힘들어도 몸은 안 팔았잖아, 다른 사람들은 너 같은 창녀가 되지 않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데 너는 왜 노력하지 않아? 라고. 아마 그 말을 한 발화자는 창녀가 되지 않는 것이 명예로운 상장이고 표창이었던 모양이다. 몸을 팔지 않는 게 자랑이고 명예인 세상, 몸을 파는 것이 불명예이고 차별이 정당한 사유가 되는 세상을 유지하고 수호하는 것이 여성을 해방시키는가? ‘당신처럼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여성들을 늘 기억하세요’라는 말은 거꾸로 창녀를 멸시하며 자신의 성녀됨/창녀가 되지 않기를 위해 노력함을 자랑스러워 하는 이들의 얼굴을 비춘다. 성노동-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은 성노동자가 존엄한 인간이 아니라, 존엄성 훼손에 대한 물적인 증거로 존재하기를 바랐다. 성노동을 통과한 성노동자가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망가지고 불행하기를 바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가진 ‘성매매 피해자’가 등장했을 때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성노동자가 죽었을 때 성노동자 불행 이론의 성공을 알리는 샴페인을 터트렸다.



성매매는 착취이고 노동이 아니고 여성들이 그 밑에서 불행하지고<<이걸 증명하는 책임을 모든 성판매자들에게 은연중에 미루는 게 문제다. 도대체 왜 내가 알아서 내 입으로 ‘안녕하세요, 저는 불행하고 비참하고 당장 이 직업을 그만두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해야 하나? 여기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매우 간단하고 정당한 답을 두고 있다. 그건 착취고 모든 여성이 그걸 미워하고 싫어하고 탈성매매해야만 착취당하는 여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 프레임 안에서 내 일에 만족하고 내 환경에 만족하고 오늘도 내일도 이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는 나는 비윤리적인 계급배반자 혹은 현실인식이 글러먹은 멍청한 피착취자가 된다. 이건 성판매자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혐오받기 쉬운 위치의 사람일수록 나에게 정당성이 있다는 믿음을 쉽게 잃는다. 그 믿음 완전히 잃으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개새끼가 되던가 개새끼인 나를 죽이거나 하나다. 성매매가 어찌되든 착취고 어찌되든 젠더적으로 계급적으로 사회적으로 어쩌구~ 해악~이라고 주장하는 건 성노동이 노동일 수 있다던가 이 일로 행복해질 수 있다던가 하는 언사들과 공존할 수 있으며 솔직히 그런 증언들 한 두개로 자기가 외치는 구호가 흔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대체 내가 성노동자입니다 라고 말하는데 ‘으 남자한테 아양 떨어서 쉽게 돈 버는 걸레년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눈치를 왜 봐야하는가????? 걔들한테 혐오당하지 않기 위해 걔들 입맛에 맞춰서 ‘안녕하세요, 저는 너무 슬프고 얻어맞는 성판매 피해자입니다’하기 싫음. 성노동 고발계정은 그렇게 착하고 불쌍한 성노동자 해서 여초들한테 여자들한테 예쁨 받고 자기가 몸 판거 걸레년소리 안 듣고 용서받으면 충분한가본데 저는 충분 안하구요. 저는 이 일 너무 좋다고 말하고 다니면서 저 혐오하지 말라고도 할 거임.


성판매 경험당사자가 취하는 여러 생존의 전략 중 하나는 피해자화를 통한 윤리적 비난의 상쇄이다. 그것이 좋다, 나쁘다, 어떤 생존의 방편이 더 낫다하는 판단을 떠나서 그것은 그저 성노동자가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하는 여러 행동전략 중 하나이다. 이는 자신의 삶을 어떤 형식을 통해 바라보고 지킬 것인가에 대한 당사자의 의지이다. 나는 모든 성판매 경험당사자가 자신이 원하는 인식론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재해석하고 통합하기 바란다. 어떤 이는 자신을 피해자로 정체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지키며, 어떤 이는 자신을 성노동자로 인식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생존을 지키며, 어떤 이는 두 가지 모두를 자신의 생존전략으로 구사한다. 메루메루 님은 성노동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어 ‘슬프고 얻어맞은 성판매 피해자’라고 자신의 삶을 피해자 서사의 틀에 끼워 맞추어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성노동을 하는 성노동자라고 말하며, 성노동자를 혐오하지 말라고 선명하게 적고 있다. 성매매 피해 여성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면 윤리적 비난으로부터 면제받을 수 있었지만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성노동을 하며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는 당사자의 존재가 성노동자 불행 이론을 뒤흔들고 위협하는 위험한 것이라고 해석한 성판매-불행론자들은 그의 삶과 증언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폭력의 피해자로 정체화하지 않는 성판매 경험당사자는 성노동자 불행 이론을 숭배하고 신앙하는 이들로부터 학대와 폭력의 타겟이 되었다.

반성매매론자였던 내가 성노동을 시작하고 나서 성노동자 권리 운동의 연대자이자 당사자가 된 것은 성노동 운동이 현직 성노동자의 권리와 안전을 대변하는 데 더 효용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성노동자 권리운동은 성노동도 다른 노동과 동등한 하나의 노동이며, 이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성산업 자본가와 성구매자에 의해 성착취와 임금착취를 당하지 않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아야 하며, 직업을 이유로 차별과 혐오, 낙인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성노동자도 존엄한 인간이라는 인권운동이다. 성노동자도 노동현장에서 성폭력을 당했을 때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삽입 성교에서 콘돔 사용이 필수임을 보장받아야 하며, 항문 성교와 같은 원치 않는 성적 행위에 대해 거절할 수 있는 결정권이 성노동자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성병에 감염될 수 있는 고강도 고위험 노동에 대해 더 높은 임금이 책정되어야 한다. 며칠 뒤에 월세와 생활비를 부담해야 하는 성노동자에게 생계에 대한 더 나은 대안이나 대책 없이 ‘네가 실직자가 되어라’라며 실업을 권유하는 비현실적인 반성매매론보다 현장의 성노동자들의 요구를 대변할 수 있는 성노동자 권리 운동이 현직 성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 더욱 유효한 운동이다. 성노동자는 노동 현장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와 함께 자신이 원할 때 전업할 수 있는 직업선택의 자유와 권리 또한 함께 보장받아야 한다. 과거의 성노동 이력을 가졌다는 것이 차별과 불이익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노동의 경험에 대해 증언할 때엔, 사회가 용인하는 특정한 형식과 구조에 따라 증언해야 했다. 친권자가 부재하거나, 법적 보호자로부터 제대로 된 보호와 경제적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가정폭력, 친족 성폭력 피해자이거나, 빈곤하거나 등과 같이 나의 삶을 피해자성으로 조합하여 배치하고, 불행의 포르노로 만들어야 비로소 ‘성매매 피해 여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성판매를 윤허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조건이나 사정을 가지고 있음을 진술해야 했다. 남자들이 나에게서 성을 구매했다면, 여자들은 나에게서 비참과 불행 포르노를 샀다. 성노동자의 비참과 불행은 교리의 간증문이 되었고, 성노동 혐오자들의 비디오 테이프가 되었다. 남자들은 나의 성을 착취했고 여자들은 나의 고통을 착취했다. 왜, 내가 생존했다는 이유만으로, 용서를 빌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규명하는 성판매 경험당사자에 한해서만 조건부로 면죄부를 쥐어주는 사회가 아니라, 성판매 경험당사자에게 면죄부가 필요 없는 사회를 원한다. 성판매 경험당사자에게 피해자 서사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판매 경험당사자가 자신이 당한 고통과 비참을 거듭 증명하고 전시하지 않아도 그가 안전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다.

나는 성노동자의 현실과 생존을 외면한 채 남들이 외치는 껍데기 구호를 따라 반성매매를 외쳤던 과거의 나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다. 성노동자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지금, 그 행동이 정말 성노동자를 위한 행동인지, 성노동자가 처한 현실적 조건을 외면한 채 그저 자기만족과 운동에 소속감을 느끼기 위한 것이었는지, 어느 쪽인지 통렬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노동자에게 주거권을 보장할 수 있는 공간인 집과, 지속적인 생활비를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생존을 위한 노동을 중단하라고 그 누구도 섣불리 말할 수 없다. 설령 그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해도, 그의 노동권을 침해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운좋게 탈성매매를 했더라도, 여전히 그 현장에 남아있는, 그 현장에 남을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있다. 내가 여성운동을 하며 집회의 대오에서 해방의 구호를 외칠 때, 그 목소리가 뚫지 못하고, 가닿지 못하는 현장에서도 오늘도 노동해야만 하는 누군가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권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생존과 인권을 침해하는 정의와 평등을 외쳐온 그 행위는 기만이었고, 폭력적인 권력 그 자체였다. 나 역시 성노동자들의 불행의 신화를 믿어왔고, 불행을 소비한 구매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성운동의 대의라는 명목 아래 성노동자들의 고통과 불행을 도구적으로 동원해온 집단적 착취에 가담해왔다. 성판매 경험당사자의 생계와 생존에 대한 고려 없이 기계적으로 성매매는 나쁘다고 외는 것은 성판매자의 생존은 내 알바가 아니고 성매매 근절만 되면 상관없다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태도이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나처럼, 여성의 인권을 위한다는 허황된 망상으로 여성과 소수자의 생존권과 주거권, 인권을 짓밟고 있다.

성노동자를 혐오하고 고립시키는 페미니스트들은 고 메루메루 님과 밀사 님을 비롯한 성노동자들에게 수년에 걸친 인신공격과 학대를 자행해 왔다. 메루메루 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성매매를 조장한다고 집단적인 괴롭힘과 학대를 일삼던 트랜스-배제적 페미니스트, 성노동-혐오적 페미니스트들이 고인을 성매매 피해 여성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고인의 말을 빌어 성노동 찬성하라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관심 가지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남의 삶에 동정 가지고 슬퍼하고 끔찍해하고 어쩌구 하는 일에도 상도덕이 있는 것이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랟펨이) 보고 있는 해방의 비전을 거부하고 코르셋이든 억압이든 착취든의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기려고 한다<<에 대해 분노반응과 여자의 적! 이라는 공격멘트로 일관하는게 래디페미의 전략인데 저도 온 세상 사람들이 성노동을 아무 다른 요소도 없는 그저 서비스업으로 인식해주면 좋겠습니다. 이게 내가 보는 해방의 비전(일부)인데.



어쨌든 성노동은 노동이고(노동이 아닐 순 없다 착취와 폭력이 있었더라도 그것은 노동을 착취한것이다) 성노동은 존엄을 팔거나 주체성을 파는 일이 아니고 (그것들은 당위로 존재하기 때문에 팔릴 수 없다) 나는 성노동을 선택해서 행복해졌다고 생각하고 성노동을 반대하든 성매매를 반대하든 불쾌함. 남의 생업에 반대한다는 소리 듣고 기분좋을 놈이 어딧겟냐.



어떤 사람들은 성노동 업장이 비극과 착취의 현장이 되는 시점만을 소비하고 싶어하는데 그러면 성노동 '실태'를 알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보단 ‘저는 여성의 섹스가 팔리는 게 너무 싫구요. 구매자들을 비난하기 위한 소스를 더 많이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말의 기교다... '실태'를 소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예뻐서 몸 파는게 내 전부기 때문에 명품 떡칠하고 성형해서 나의 가치를 증명할거야 하고 한달 천벌고 사백은 유흥비, 백, 차, 성형에 쓰는 사람의 실태는 한남주작이라고.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아무 착취도 일어나지 않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고. 반성매매론자들은 성노동론자들이 '진공'을 상정하고 말한다지만 성노동 밖의 공간은 착취와 폭력에서 진공이 될 수 있습니까? 난 여기만 좀 밀도가 높을 뿐인거 같은데.


남자들이 여성의 몸을 동원하여 성적 포르노를 찍는다면, 여성들은 성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동원하여 불행과 비극의 포르노를 찍는다. 성노동자들의 삶과 생은 뒷전이고 해당 산업을 철폐할 빌미와 구실을 찾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성노동 운동가의 죽음을, 그의 삶과 생의 행적을 모두 지워버리고, 그가 그토록 거부했던 피해자 서사에 고인의 삶을 욱여놓고 왜곡하는 것까지, 성노동자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살뜰하게 착취하는 것이 두 착취가 너무나 닮은 꼴이다. 그는 성노동자들이 왜 죽는지에, 왜 죽음에 이르는지 대해 꾸준히 말해왔다.




제가 생각하기엔 그 뭐냐
성판매하는 여성분들도 그 뭐냐 훌륭한 노동자시다 이거 한마디만 입에 바르면 자살하는 사람이 조금 줄 거 같다 이거죠.. 이게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 유토피아적 소리라기에는 성판매업 종사자들은 정말 대부분 다 자기 직업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 보이거나 자기가 나쁜 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거나 좀 그런 사람이 많아 보이지 않냐 말은 좀 곱게 해줍시다 막 소리지르고 혼내고 겁박하고 신고하지 말고


착취당하면서 내가 나쁜 일을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다고 죄책감을 가지고 학대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이다. 이게 다만 학대자 한명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문제인가? 사회는 성노동을 노동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결국 누군가는 이 업계에서 계속 일할 수밖에 없고 언제나 들이닥칠 수 있는 폭력이나 착취의 시도들을 마주해야 한다. 탈성매매하지 못하는-않는 여성들의 생존에 이것이 정당한 노동이라는 믿음은 너무 필수적이다. 우리는 노동을 하고 있고 이 일을 계속 하면서도 존엄을 유지하고 착취당할 수 있다. 그것은 힘든 일이고 그 가능성을 믿어주는 사람은 너무 적다.



너의 존재는 죄다, 너의 생존은 불법이다, 이 세상에 너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사회적 소수자인 대상에게 주입시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왜 성소수자 그룹이 비성소수자 그룹에 비해 정신질환 유병률과 자살율이 더 높을까? 왜 성노동자 그룹이 비성노동자 그룹에 비해 정신질환 유병률과 자살율이 더 높을까? 어떤 때에는 성구매자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것보다 나의 존재가 불법이고, 그낭 내가 숨 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여성인권을 후퇴시키고 성매매를 조장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더 아플 때도 있다. 성적인 폭력, 물리적인 폭력만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집단적 괴롭힘, 집단적 학대는 그 대상을 죽음과 좀 더 가까운 자리로 가져다 놓는 역할을 한다.

고인의 트위터 계정명은 ‘#허니팝콘응원합니다_여자의동지는여자다’이다. 고인이 유명을 달리하기 직전까지 사용했던 계정명이라는 이야기다. 허니팝콘은 성노동 이력이 있는 여성이 포함된 아이돌 그룹이다. 성노동자가 아이돌로 데뷔한다는 소식을 들은 성노동 혐오자들은 득달같이 몰려들어 성노동자의 새로운 직업으로의 도전과 시도를 반대했다. 성노동자에게 공장 노동이나 콜센터 노동을 하라고 하면서 정작 성노동자가 아이돌로 데뷔하려고 하자 다른 직업으로 이직하지 못하도록 국민청원까지 올려 성노동자가 직업을 갖는 것에 반대했다. 그 결과 예정되어 있던 허니팝콘의 데뷔 쇼케이스와 팬미팅은 연기되었다. 성노동자가 성노동 이외의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에 국민청원까지 올려 탄압하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성노동 혐오자들은 그 사건을 창녀인 성노동자를 양지에서 몰아내고 음지로 쫓아낸 승리라며 축배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성판매 경험당사자들에게는 그 사건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건 성노동자 모두에게 보내는 본보기의 메시지였다. ‘한번 걸레는 평생 걸레, 한번 걸레는 영원히 걸레’라는 말을 암묵적으로 성노동자들에게 보낸 것이다. 성노동에 종사한 이력이 있는 여성은 성노동 이외의 다른 노동을 해서는 안 되고, 영원히 창녀로만 남아야 하고, 사회와는 격리되어 다른 노동은 꿈도 꾸지 말고 영원히 몸만 팔아야 한다. 성노동자의 전업과 탈성매매를 교조적이고 폭력적으로 강권하면서도 막상 성노동자가 성노동이 아닌 다른 노동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는 탄압과 반발을 가하는 것이다. 성노동자는 자신이 성노동을 쉬고 싶거나, 그만두고 싶을 때 언제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성노동자에게도 비성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전업과 직업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성노동자라는 이유로 전업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당하거나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 허니팝콘의 아이돌 데뷔에 반대함으로써 성노동자의 직업선택권 박탈에 찬성하고 찬동했던 사람들은 반성매매나 탈성매매를 말할 자격이 없다.

성노동자의 대한 차별을, 사회가 집단적으로, 공공연하게 행사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 메루메루 님은 자살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가 살아생전에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앞장서서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던 이들이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하여 메루메루 님을 불쌍한 피해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메루메루 님을 비롯한 성노동자들을 향해 성매매를 조장하고 성착취를 긍정한다며 괴롭히고 학대하던 이들이, 성노동자의 직업선택권에 반대를 외친 이들이 메루메루 님이 성매매 피해로 인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가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인의 친구와 주변인들에게까지 그 표적을 돌렸다. 고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밀사 님을 향해 밀사 님이 고인을 죽게 만들었다고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루머를 만들어 유포하였다. 고인의 삶을 비난하고, 고인의 시신까지 훼손한 이들이 고인의 친구와 주변인들에게 까지 폭력을 가한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뒤에 남겨진 자살생존자들에게 그 죽음이 너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자, 가해이다. 성노동자에게 더럽다, 그렇게 살지 말라, 성병에 걸려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과 사회가 더럽다고 부르는 성노동자들 곁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간 친구들 중 누가 그를 죽음과 가깝게 하고, 누가 그를 삶의 자리에 서게 할까.

성노동 이외에 다른 노동으로 접속하지 못하도록, 성노동 이외의 다른 노동은 할 수 없도록 다른 노동으로의 접근을 박탈하고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차별과 배제를 찬성하던 이들은 성판매 경험당사자의 죽음을 추모하거나 애도할 자격이 없다. 그들의 손에 죽은 이들의 피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메루메루 님 살아생전에는 성매매를 조장한다고 비난하다가, 메루메루 님이 사망하자 성매매 피해 여성이라고 말하는 몰염치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타자의 삶을 연민하고 애도하는 것에도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 성폭력 2차 가해자가 자신의 가해에 대해 피해당사자에게 일절 사과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성폭력은 잘못된 것이며, 성폭력에 반대한다고 외친다면 그것은 피해자를 우롱하고 모독하는 또다른 가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메루메루 님을 향해서, 성노동자들을 향해 성매매를 조장한다거나, 성착취를 긍정한다는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성노동자들의 고통과 죽음에 기여한 이들이다. 이들이 자행하고 있는 것은 인권운동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기생하여 당사자의 고통을 자신의 자아실현의 도구로, 이슈파이팅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들의 행태에 대해 메루메루 님의 말을 빌리자면 “님들은 피해자의 피해자성을 마음대로 호출해서 지들 선동에 써먹으면서 착취하는 씨발좆같은 선동꾼들”이다.

성판매 경험당사자들의 경험은 단일하지 않다. 인신매매를 당해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성착취를 당한 성매매 피해자도 있으며, 그와는 반대로 성노동이 즐겁고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줄곧 성노동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성노동자도 있다. 자발과 비자발의 여부에 관계없이 자신을 성매매 피해자로 정체화하는 사람도 있으며, 더 나은 노동환경을 원하여 성노동자 권리운동을 지지하는 성노동자도 있다. 이 노동이 고통스럽다고 말하든 행복하다고 말하든, 그 모든 말들이 성노동자들의 목소리이다. 석영님이 쓰신 <진상: 창녀를 증오하는 여성들>을 읽으며, <저는 성노동을 너무 사랑하는 성노동자입니다>를 포함하여 메루메루 님이 자신의 블로그에 쓰신 글들을 읽게 되었다.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더 힘들다. 성노동이 노동이라는 것 이곳에 고통이 착취가 불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청정구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아니 그러니까 그 불행이 세간의 흔한 불행보다 딱히 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은 글쎄 뭘까. 퀴어정치 담론에서 흔한 답이라면 그건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다. 근데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퀴어정치에서 잘 사는 게이를 잘 사는 레즈를 보여주려면 그 사람들을 결혼시키고 고학력에 똑똑하고 친절하고 섹시하고 부유한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아~ 질린다~ 나는 왜 행복해야 하나~ 나는 인간 세상에 적응하기 싫은데~ 왜 잘 사는 모습 보여줘야 하지~)(그래야 님도 일등시민 아니면 이등시민 으로의 시민권이 있다는 게 증명되니까요)



내가 결국 글을 써서 보내게 되는 것 내가 내 일을 너무 좋아하고 나는 완벽하게 행복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 내가 성노동자라고 말하게 되고 담론장에 참여하는 것에 정치적 이유가 있다면 이런 모독들을 모독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저항하고 싶기 때문이고



내가 일상 속에서 남들과 다름없이 슬픔이나 고통, 우울함을 토로할 때 그것이 내가 생계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 생존 중단 권고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저 행복이나 기쁨과 같은, 고통과 슬픔의 감정들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이 던지는 동정의 지폐 다발로 얼굴을 맞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우울한 것, 네가 불행한 것, 네가 고통스러운 것 모두 네가 성노동을 해서이기 때문에 너는 너의 생계활동을 멈추어야 한다고. 타자의 고통을 사진으로 찍어 ‘자, 이것 봐라, 성판매자는 불행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니 성노동자들의 생존수단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라고 만인의 동정거리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내 슬픔이나 고통이 내가 더 이상 생존하지 말아야할 합당한 이유가 되어버리는 거다. 구경거리가 되어버리는 거다. 메루메루 님이 쓰신 <저는 성노동을 너무 사랑하는 성노동자입니다>에는 많은 댓글이 달려 있다. ‘몸 안팔구 살거라서 몰겟는데여~~~ 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대학 잘 다니구 잇거든여 ㅎㅎ 앞으로도 잘살 듯’이라며 자신의 특권과 권력을 자랑하며 성노동자를 조롱하는 사람, ‘부동산(공인 중개 및 감정 평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신의 감각을 최대한 살려서 목돈이 될 만한 부동산에 제대로 투자해보시기를, 감히 조언드립니다. 돈이 조금이라도 모이면, 반드시 향후 목돈이 될 만한 부동산을 구입해서 묻어두십시오. 그러면 장차 큰 재산이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심훈 시인의 시처럼, 그 날이 오면... ... 성노동자고 자시고 그따위 비속어에 초연해지고 의연해진... 정승 같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어른의 세계는, 특히 대체로 40대 이후부터는... 부동산과 재테크입니다’라며 부동산 공인중개사 공부를 해서 부동산과 재테크를 하라고 탈성매매를 권하는 사람, 정말 온갖 무례하고 폭력적인 인간 군상이 있다.

그 무수한 댓글들 사이, 2020년 3월 22일에 달려 있는 댓글이, 메루메루 님과 많은 성노동자들에게 닿았으면 좋겠다.

“ 메루메루 님, 나는 님이 말한 ‘똥멍청이 쓰레기같은 아줌마 꼰대새끼’ 중의 하나에요. 그리고 정말로 그런 것 같아서, 아무것도 못해서 너무 미안합니다. 지금은 혐오와 낙인 없는 세상에서 평안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님의 친구들에게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성판매하는 여성들도 정말 훌륭한 노동자이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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