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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기고문

장례식을 지켜보며

장례식을 지켜보며
겨울나무

 

 

 

분명하게 말하지만, 난 고인과 어떠한 인연이나 기억이 없으며, 그의 삶의 궤적과 흔적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도 못한다. 다만 그가 남긴 생전의 기록과 그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그의 언어를 접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기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단 하나다.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그것도 아주 가볍게 행해지는 이 거대한 장례식이 내게는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내가 목격한 건 고인의 장례식이 아니다. 고인의 기일, 고인에게 조의를 표하는 #메루메루빔과 그를 추모하는 주변인들의 모습을 3년째 봐왔지만, 이를 목격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지난 3년간 지켜보았다고 똑똑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인간성의 종말뿐이다. 내가 목격한 것은 스스로 여성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가치의 죽음에 대한 장례식이다. 이것은 꼭 자살처럼 보인다.

본인의 추측과 생각만으로 어떤 사람의 삶을 완전히 재구성할 수 있다고 여기는 오만, 다른 입장을 이유로 누구의 얼굴 사진을 합성해 유포하는 저열함, 그러한 저열함을 목격했으면서도, 다른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소리나 해대며 멀찍이서 구경하다 말 한마디 얹고 가는 몰염치가 아주 다채롭게, 집단적으로 이어져 왔다. 이런 행동들을 대단한 여성주의적 가치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도리어 자신의 여성주의를 죽이는 일임에도.

어떠한 거대한 구조도 이론도 담론도 당장 오늘의 삶 앞에서는 무가치하다. 고상한 언어와 기워낸 지식은 삶 앞에서 힘을 잃는다. 잃어야 마땅하다. 그 어떤 운동도 삶 앞에 설 수 없다. 운동이 삶 앞에 서야 하는 유일한 때는 그 삶을 지키고 살아가야만 할 때다. 어느 성노동자의 삶을 파편화해 이론에 끼워 맞추는 작태는 운동이 될 수 없다. 고인이 생전에 밝힌 기치와 기록이 남아있음에도, 그를 완전한 피해자로 ‘소비’하는 이들의 가벼움은, 너무나 묵직한 죽음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인이 남의 삶을 운동의 연료로 써먹고 있다. 삶을 연료로 한 운동의 끝은 연소임을 알고서 타인을 연료로 삼는 것일까. 액정 안 140자 남짓한 글로, 열 글자 정도 되는 해시태그로, 고작해야 손 위의 기계 하나 속에 고인의 삶을 가두고 멋대로 재단하며 주변인들을 조롱하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여성주의가 활활 타오를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자살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이 거대한, 집단적 가벼움이 나는 무겁고 또 무섭다. 다음의 연료를 찾아내기 전에, 이 무거움을 많은 이들이 깨닫기를 바란다. 타인의 삶은 그 무게를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가벼이 여길 수 있는 내 삶의 영역 속에서 짐작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을, 가볍지 않은 것을 가볍게 여기는, 그럼으로써 어떠한 나음도 어떠한 삶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길 위에 서지 말기를 바란다.

트위터 유저 밀사를 향한 사이버 불링을 중단하고, 고인의 기록과 삶을 왜곡해 소비하지 말라. 메루메루가 온전한 피해자라며 파편화하지 말라. 당신이 믿는 이론과 가치가, 정의가 정말로 중요하고 당신에게 무겁다면, 무거운 것을 제대로 무겁게 대하라. 장례식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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