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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기고문

메루와 교류했던 성노동자로서 쓰는 글

메루와 교류했던 성노동자로서 쓰는 글
익명

 

 

 

나에 대한 소개를 하자면, 나는 성노동자다. 본격적으로 성노동에 뛰어든 것은 재작년 겨울이지만, 갓 스무살 즈음부터 20대 초 즈음엔 내내 일년에 두어 번 정도 조건만남을 해왔다. 20대 초중반 당시에는 부모의 금전적 지원으로 살았고, 재작년 겨울부터는 성노동으로만 벌어서 살고 있다. 

 

정신건강에 그다지 좋지 않은 가정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살면 취업을 하지 않아도 '생존까지는' 가능했던 상황. 갓 스무살의 나도 재작년의 나도, 소위 말하는 경제적 절박함이 없는데도 (내 상황에서는 나름대로의 절박감을 느꼈음에도!) 성노동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많이 느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먹고 살 수는 있으면서, 상황을 타개할 어떤 의지도 노력도 발휘하지 않고 ‘감히’ ‘몸을 판다’는 것에 대해서. (물론 그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당시의 내가 ‘어떤 의지도 노력도 발휘하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죄책감 건에 대해 기억나는 부분을 말해보겠다. 트위터 내부에 장미계 타임라인, 그러니까 일종의 성노동자 당사자 커뮤니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장미계를 만들었다. 가장 먼저 올린 말이 뭐였더라? 문장이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으나, 아마도 이런 내용이었을 거다. 가족과 살면 생존은 가능하지만, 나는 당장이라도 따로 살고 싶다. 새 휴대폰이 사고 싶다는 이유로 조건만남을 한다면 다른 장미계 분들께 민폐인 것이냐. 그런 내가 나쁘고 싫다면 부디 이야기해달라.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다른 분들께 더 폐 끼치지 않고 여기를 떠나겠다. 그런 장황한 말들이 이어졌다. 다행히 다른 장미계 분들은 그런 말들을 보고도 나를 내치지 않아주셨고, 내가 본격적인 생계의 수단으로 성노동을 택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다. (이러한 커뮤니티가 성노동자의 안전과 생존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두가 알아야 한다.)

 

20대 초에는, 성노동을 하고 나면 으레 덜컥 겁나고 무서워서, 몸에서 받지도 않는 술을 마시고 토하며 숙취로 뒹굴곤 했다. 내가 느끼기에, 메루가 생전에 말해왔던 것들은 성노동자의 이런 현실에 대한 것들이다. 많은 성노동자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배척과 낙인으로 인해 자기혐오를 강요받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오픈된 공간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의 멘탈을 케어하는 일마저 사회적으로 금지당하고 있다. 그 안에서 죽어가는 것은 여성이다. 소위 ‘창녀’로 불리는, 다시 말해 여성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우리가 죽는 이유엔, 남성들의 가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화류계 커뮤니티나 장미계 타임라인에 허구헌날 주구장창 올라오는 이야깃거리가 뭐냐면, 여초 사이트에서 창녀 혐오-창혐하는 내용의 글과 스크린샷들이다. 많은 성노동자들은 같은 (그러나 ‘창녀’는 아닌) 여성들이, 우리를 ‘창녀’라서 미워한다는 것에 대해 절망감과 서러움을 느낀다. 그런 여성들의 창녀 혐오가, ‘창녀’이고 성노동자인 여성들을 죽음으로 몰고 있다고 생각한다. 

 

​메루 또한 그 현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기 전까지 그 현실의 부조리함에 대해, 그로 인한 절망에 대해, 계속해서 발화해 왔던 것이다.

 

​오랜 기간 앓아온 정신질환, 오랜 기간 복용해 온 정신과 약물로 인해 기억력이 매우 좋지 못해서 내 기억들은 단편적이지만,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메루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내가 처음 메루를 알게 된 시점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아마도 메루가 어떤 남성 트위터리안에게 부당한 일을 당한 후 거기에 대처하는 과정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 이전에 메루와 교류가 있었는지는 확실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튼, 이미 그 시절부터 메루는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하면 도움을 구할 방법도 찾아 나서고,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표명할 줄 아는 씩씩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메루는 교류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려 깊고 친절하면서도,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단호하게 말하고 지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메루의 글에 다양하고 활발하게 반응했고, 메루 역시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나누었다. 메루 사후 메루를 추모하는 해시태그 #메루메루빔이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오른 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사실 이렇게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어떤 사유로 인해, 메루가 사망할 즈음에는 난 메루와 교류를 하고 있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어느 날 메루가 사장과의 관계에 대해 글을 올렸을 때, 나는 부정적으로 반응했었고 메루는 거기에 대해 화를 냈었다. 메루의 성격과 성향이 어쨌든간, (메루의 그러한 면모를 모두 알고 있음에도) 메루의 친밀한 주변인들이 거리낌 없이 걱정을 표했었던 것, 거기에 메루가 반발하곤 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것이 내가 메루가 일방적으로 가해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이며, 메루의 주변인들이 메루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이유이다.

 

한 번은 메루가 내가 사는 곳 근처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언젠가 메루 방에 초청받았을 때, 나는 메루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메루 방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쓰레기를 전부 치워버린 적이 있다. 메루는 그것을 매우 좋아하지 않아했다. 메루는 자신의 영역이 침범되는 것을 정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 말고도 어떤 예시를 더 들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내 기억 속의 메루는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대가를 얻어내는 데에 능숙했었다. 다른 사람이 옆에 있을 때에는 활발하고 높은 텐션을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조용하고 멍해져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치 절전모드 같았다. 트위터 특유의 해시태그 문화, 마음 알티 멘션 등으로 반응한 주변 인물을 분석하기 같은 것을 할 적에도, 타인의 성질? 본성? 을 잘 파악한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나는 메루가 그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일방적으로 가해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피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재기와 능력만으로 피해지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메루는, 누군가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심신 미약에 빠져 있고 '성노동론에 뇌가 절여'져서, 자신이 어떤 피해를 입는지도 모를 만큼, 거기에 어떤 대처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거다. 메루에 대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메루만큼 강하고 총명하지 못할 것이다. 하긴 메루와 비등하기라도 했다면 그런 바보 같은 말은 할 수 없었겠지. 아무튼 그래서 나는 밀사님의 주장이 옳다고 느낀다.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얼마 전 상담 치료를 받으며 나는 내가 성노동을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상담사가 이야기하기를, 몇 년 전에 상담했을 때엔 20대 초반 시절 성매매를 했던 사실에 대해 괴로워하며 죄책감을 토로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보인다는 것이다. 상담사는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내게 물어보았다. 당시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온라인 상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이 일을 하는 스스로에 대해 잘못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그런데 지금 그 기억을 다시금 되짚어보니, 다른 게 아니라 이런 것이 바로 성노동론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성노동이라는 것도 결국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하고 있다는 것. 있을 수 없는 일,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이라는 생각을 사람 따라 할 수야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엄연히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노동자들도, 성노동자가 아닌 사람들도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그래서 성노동자들이 자기 비하를 그만두고, 성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이 더는 성노동자를 비난하지 않게 되는 것.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히 그러해야 하듯이, 성노동자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 말이다.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좀 더 성노동자를 존중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밀사님을 괴롭히는 것은 메루를 포함한 성노동자를 존중하는 방법도 아니고 옳지도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는 밀사님을 지지한다. 그리고 메루를 계속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