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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기고문

약과 잠이 모자란 상태에서 쓰는 일기

약과 잠이 모자란 상태에서 쓰는 일기
혜원

 

 

 

대부분의 불행은 가난으로부터 나온다. 돈이 미어터진다고 안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안정제 몇 알은 보장이 된다. 원할 때 원하는 것을 사고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 있을 수 있게 한다. 잔고에는 네 자릿수의 돈이 남아 있다. 어쩌다 보니 무리해서 알바를 하고 있다. 메신저에는 답하기가 두려워 대답하지 못한 연락이 두셋쯤 있고, 마감시간까지 버티기 위해 마신 커피는 다리를 떨게 만든다. 무엇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더라.

 

2020/04/02 - [진상] - 진상 : 창녀를 증오하는 여성들


메루님의 기일이 어제였다. 만우절의 바로 다음 날이라, 이젠 뭐든 금세 잊어버리게 된 나도 쉽게 외웠다. 3년 전의 여름 익산에는 나도 있었다. 본문 중 '화류계 일 자체가 처음이신 분'이 바로 나다. 이어지는 한마디가 사실과 다른데, 나는 돈을 벌고 돌아갔다. 익산을 뜨기 직전 방을 딱 하나 봤고(잊어먹을 만도 하다), 돌아가 그 돈으로 동생과 참치회를 사먹었다. 내가 누군가를 원망하길 바라는 무수한 이들의 기대에는 부응할 수 없게도, 무척 즐거운 날들이었다. 아빠 집은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았는데 모텔 숙소는 에어컨이 언제나 빵빵했기 때문이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2시간 간격으로 있는 아빠 집과는 다르게 눈을 뜨면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했냐고 물으면, 확실하게. 라고 답할 수 있다. 다른 여자 인권 까먹으며(ㅋㅋ) 재미봤냐고 누가 빈정거리더라도, 응. 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즐거운 기억이다. 돈까지 벌어갔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름이었다. 아니다. 사실 한 번 울었다. 긴장도 했다. 세상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일은 아주 무시무시하고 무섭고 또 끔찍하고 잔인하고, 어쨌든 그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수사를 가져다 붙여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이 손에 쥐어졌을 때는 허탈했다. 이걸 가지고 그렇게 유난을 떤 거야? 처음 본 남자한테 아양 떨고 비위 맞춰주는 게 세상의 모든 추악함을 담은 일이야? 이렇게 적고 나니까 유난 떨어야 할 일이 맞네요. 싫어도 좋은 척하면서 남자한테 애교 부리고 대가로 돈 받았으니까 돌로 쳐죽임당해야 아주 마땅한데 말이에요. 어쨌든 참치는 맛있었고 에어컨은 시원했다. 요즘은 가끔 비건을 한다.


나는 대체로 밀사 편이다. 꼬우면 너도 똑똑하고 재밌는 말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서 나랑 친구 하든가. 나는 별로 안 권하는 일이다. 정신병자 친구는 아주 예민하고 예상하기 힘들며 대하기 불편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정상인 친구가 있다면 복 받은 줄 알도록 하고 걔랑 노세요. 나를 고쳐 쓸 생각일랑 접어두는 게 좋다. 뒤틀린 나무는 좋은 원목이 될 수 없다.


다시 한 번, 무엇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더라. 존재하는 게 괴로워서, 견디기 위해 메모장을 켰다. 삶이 처벌이라는 생각을 매우 자주 한다. 나는 엉엉 우는 7살짜리 여자애고, 뭔가를 잘못해서 혼나고 있다. 그런 괴로움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괴로울 리 없다. 종아리가 따끔거리고 너무 울어 눈이 시리다. 온몸이 벌벌 떨리고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 견디기 위해서는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정신을 아주 다른 곳에 팔고 있으면 혼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


똑똑하고 재밌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 메루님을 팔로했었다. 나는 이제서야 이해하는 것들을 메루님은 나보다 어린 나이에 이야기했고, 젠장 이 이상 쓰기 수치스러워진다. 어쨌든 트위터 한 구석이 메루님이 죽고 나서 멈췄다. 거기선 아직도 성노동이 노동이라는 명제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거 말고도 더 해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만큼 있는데 2년 전에 멈춰서 움직이질 않는다. 아! 그러니까 누가 죽으래요! 타임라인이 정말로 멈춰버렸잖아! 날 이 바보들 사이에 두고 가다니! 답을 해 줄 똑똑한 사람은 죽었고, 답변은 없다. 산 사람들끼리 남아서 죽은 이의 트윗만 닳도록 언급하고 인용하고. 시체 좀 손에서 놓게 해주라 개자식들아. 너희 때문에 애도나 추모 같은 짓을 계속해야 하잖아. 그만 하려면 멍청이들도 알아들을 만한, 내 진영에(만일 그런 게 있다면) 유리한 보기좋은 이야기만 늘어놔야 하는데 나는 꼭 초를 쳐야만 성이 찬다. 메루님이 죽고 2년이 지나서야 "애도할 수 없음에 대해"를 대충 이해한다. 이 글을 쓰는 건 합리화의 산물이고, 똑똑했으니까 알았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좀 봐줘요. 답변은 없다.


성노동 얘기 조금만 더. 나는 성노동이 얼마나 괴로운지 혹은 즐거운지 그만 얘기하고 싶다. 피씨방 알바와 비교해서 성노동이 나를 얼마나 갉아먹는지 혹은 구원하는지 이런 것도 그만 이야기하고 싶다. 삶에는 너무나 많은 맥락이 존재해서 그것들을 나열하는 일은 아주 많은 시간을 소요시키는데, 이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나아갈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시간마저 홀라당 가져가버리고는 한다. 망할 인정투쟁. 피씨방 알바생인 나에게도 노예창녀인 나에게도 필요한 건 더 나은 삶이다. 더 나은 환경에서 건강과 안전을 보장받고 합당한 보수를 받고, 더 나아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연대를 만들고 고용주들과 협상하고 자체적인 안전망을 만드는, 그런 일들이 거의 금지당해 있다고 느낀다. 이유를 찾으면 다시 인정과 낙인 문제로 돌아가겠지. 지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지쳐서 그만두고 염세주의에 빠져드는 일을 또한 경계한다. 아무리 삶이 도돌이표 같고, 무의미하고 소모적이고 또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결국 삶은 조금씩 느리게 바뀐다. 쓸모없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도 나아지고 또 달라지기 때문이다.


밀사가 본인과 고인에 대한 모독적인 루머에 대해 강경 대처를 하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밀사를 지지한다.
그리고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나갈 것이다.